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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세일 오픈런 하던 파리지앵이 미니멀리스트가 된 이유

[리뷰] 영화 <디피컬트>

24.05.09 10:50최종업데이트24.05.09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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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디피컬트> 스틸컷 ⓒ TCO(주)더콘텐츠온

 
 '파리'하면 그려지는 로맨틱한 이미지, '파리지앵'의 시니컬한 낭만과는 정반대의 인상도 있다. 프랑스 혁명부터 시작된 시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는 시위의 본거지라는 두 얼굴을 만들었다. 영화 <디피컬트>는 전자보다 후자 쪽 파리의 얼굴이 떠오르는데, 영화 < 120BPM >의 '액트업 파리(Act Up Paris)'의 21세기 버전처럼 느껴진다.
 
액트업 파리는 에이즈의 무서운 확산에도 정부와 제약 회사의 무책임한 행동을 규탄한 단체다. 그밖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에이즈에 대한 대책 강구, 에이즈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기 위해 다양한 퍼포먼스형 시위를 펼쳤다. < 120BPM >에서는 액트업 파리 활동가들의 사랑, 우정, 연대를 프랑스 전역을 무대로 박진감 넘치는 비트로 담아냈다.
 
그들에게 120BPM의 비트는 심장이 뛰는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박동이면서도 인간으로서 반드시 누려야 할 권리를 제대로 존중받지 못한 이들의 반항과 분노의 반향으로 작용한다. 살아 있어서, 살 수 있어서 심장은 멈추지 않는다는 당연한 이유처럼, 소중한 삶을 잊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불태운다.
 
블랙프라이데이 오픈런에 참가한 파리지앵
  

영화 <디피컬트> 스틸컷 ⓒ TCO(주)더콘텐츠온

 
<디피컬트> 속 시위는 과도한 소비문화로 영향받는 온난화 위험과 전 지구적 문제점을 일깨우는 의식 개선의 형식으로 그려진다. 오프닝부터 인상적이다. 제목 '디피컬트'의 원제는 A Difficult Year로 새해 인사에서 따왔다. '올해도 힘들었던 한 해입니다'쯤으로 해석된다. 나아지기는커녕 올해, 내년이 점점 힘들기만 한 세계인을 향한 위로다.
 
첫 장면은 블랙프라이데이를 맞아 백화점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혼란스러운 눈치싸움이다. 다만 모두 세일 상품을 사려 몰려든 구매자가 아니라는 데 있다. 한쪽은 소비를 원하는 손님이고, 한쪽은 소비를 줄이자고 주장하는 환경운동 단체다. 두 그룹은 사려는 쪽과 막으려는 쪽으로 나뉘어 팽팽히 대치한다.
 
오픈런을 위해 백화점을 찾은 사람들로 북적이다 못해 아비규환 자체다. 작정하고 평면 TV를 사러 왔던 알베르(피오 마르마이)는 상점 앞을 막고 있는 캑터스(노에미 메를랑)와 말싸움을 벌이다, 가까스로 원하는 물건을 구매한다. 평면 TV가 없으면 당장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싸게 산 물건을 중고시장에 되팔아 차액을 얻으려는 꼼수였다.
 
드디어 접선한 구매 대행자의 집으로 배달까지 갔는데 물건값은 커녕 위기의 순간을 맞는다. 지나친 쇼핑 중독으로 빚만 쌓여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던 브루노(도나단 코헨)를 가까스로 구해내고야 만다. 거래하러 왔다가 사람을 살려내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사실 알베르는 집세도 내지 못해 직장인 공항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다. 무리한 대출로 빚더미에 앉아 파산 직전인 상황이라 돈 되는 거라면 뭐든 해야 했다. 대외적으로는 공항에서 일한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현실은 공항 세관을 통하지 못한 물건을 빼돌려 불법 판매를 하며 몇 푼이라도 벌고 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건지 절박한 상황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환경 단체에서 제공하는 공짜 맥주와 감자칩에 이끌려 우연히 환경 단체 모임에 참석하게 되면서 알베르와 브루노는 친구가 되고 환경운동가 캑터스와도 재회한다. 알베르는 지구 온도를 낮추는 일, 환경을 살리는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캑터스를 향한 화살표가 가리키는 환경 단체의 일을 도우며 조금씩 가까워진다.
 
과잉 소비가 부른 나비효과
  

영화 <디피컬트> 스틸컷 ⓒ TCO(주)더콘텐츠온

 
영화는 프랑스의 대표 코미디 듀오 감독 '에릭 토레다노'와 '올리비에르 나카체'의 신작이다. <언터처블: 1%의 우정> <웰컴, 삼바> <세라비, 이것이 인생!> 등이 대표작이다. 비극 속에서 희극을 찾아내는 재능이 빛나는 콤비 감독이다. <세라비, 이것이 인생!>은 2015년 파리 테러로 충격과 비탄에 빠진 국민을 위로, 재건의 희망을 담아 특별히 제작된 위로의 영화다. 이처럼 현실에서 시끄러운 사회 문제를 스크린으로 끌어 들여와 코미디로 빚어낸 프랑스 특유의 매력이 담겨 있다. 두 감독의 영화에는 당황스러운 설정과 막무가내 캐릭터가 등장해 무해한 웃음을 안긴다.
 
<디피컬트>에서는 소비로 공허한 행복감을 느끼는 맥시멀리스트 브루노가 바통을 이어받아 능청스러움을 유발한다. 이번에는 과소비를 부추기는 시장경제, 그로 인한 생태계 파괴, 기후변화의 연쇄적 문제점을 다룬다. 메시지에 인물의 각각의 사연을 덧씌운 형태가 조화롭다.
 
미니멀리스트 캑터스가 중심을 잡아 돈과 물건에 얽매여 있던 알베르와 브루노의 가치관 변화에 일조한다. 또한 자원활동가 앙리(마티유 아말릭)까지 가세해 과소비 방지를 위한 팁도 선사한다. 그가 선택한 과소비 방지 원칙은 허기진 상태로 마트에 출입하지 말라는 현실적인 조언이다.
 
소비에 앞서 '이 물건이 정말 나에게 필요한가' 생각해 보는 방법, 쓰지 않는 물건은 바꿔 쓰고 1+1에 현혹되지 않거나, 이미 산 물건은 주변과 나누는 마음을 소소히 알려준다. 캑터스는 부족함 없던 금수저였지만 우연히 접한 환경 논문에서 세상의 이치를 깨달으며 각성했다. 이후 불필요한 소비를 막기 위해 강경한 입장을 드러내는 진보적인 환경 운동가, 실천하는 미니멀리스트로서 가구 대신 사람을 채우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
 
현실, 로맨스, 코미디의 적절한 조합
 
 

영화 <디피컬트> 스틸컷 ⓒ TCO(주)더콘텐츠온

 
물건을 통해 나의 가치를 동일시하는 최근 트렌드는 스스로를 좀 먹고 지구 온도를 상승케 한다. 굳이 필요 없어도 남의 눈을 의식하거나 세일에 현혹되고야 마는 소유욕은 현대인의 고질병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미니멀리스트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소중한 것을 위해 물건을 줄이는 사람이다. 최소한의 것을 가짐으로써 최대한의 것을 갖는 아이러니다.
 
당장 미니멀리스트가 되어 물건을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모두 미니멀리스트다. 엄마 뱃속에서 무엇 하나 들고나오는 사람 있겠는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인생은 아무 준비 없이 왔다가 다 놓고 되돌아가는 것이다.
 
<디피컬트>를 통해 단순한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불필요한 물건만 줄여도 훨씬 가벼운 인생이 된다는 걸 영화는 해학으로 답하고 있다. 내가 왜 이렇게 하루하루를 종종걸음으로 시간에 쫓기며 살았는지 이해하며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다. 오늘 보다 내일은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되길 바라는 희망이 영화 전반에 유쾌하게 흐른다.
디피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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