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가사가 처음 쓰인 곳, 한글 문화의 터전이었네

정읍 칠보면 성황산 상춘곡 둘레길 탐방 여행

등록 2024.05.10 09:55수정 2024.05.10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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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극인 귀향 벽화, 정읍 태인면 원촌마을 골목길 ⓒ 이완우

 
수간모옥(數間茅屋)을 벽계수(碧溪水) 앏픠 두고,
송죽(松竹) 울울리(鬱鬱裏)예 풍월 주인(風月主人) 되어셔라.
(초가 몇 간을 푸른 시냇가 앞에 지어 놓고,
소나무 대나무 울창한 숲속에서 풍월 주인이 되었도다.)
- <상춘곡> 가사 일부


정읍 칠보면 원촌마을의 뒷산인 성황산(125m)에는 가사 문학의 효시 작품인 정극인(丁克仁, 1401~1481)의 <상춘곡> 전체 문장이 오솔길 곳곳에 팻말에 씌어 전시되었다. 5백 년 전의 시가 문장이지만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지 않은 정극인의 가사 <상춘곡>의 배경인 정읍 성황산을 찾아 탐방 여행하였다.


성황산에서 5월 초순의 신록 숲 사이로 만경강, 동진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인 호남정맥의 묵방산이 멀리 바라보인다. 호남정맥 동쪽의 섬진강 옥정호의 강물은 유역변경 하여 칠보발전소를 거쳐 동진강 상류의 수량을 풍부하게 하였다. 

이 산 앞에 옛날에는 맑은 호수가 있었는데, 그 호수의 맑고 푸른 물결과 백사장 곁에 선비들은 정자를 짓고 예술과 학문에 정진하였다. 성황산 앞의 칠보물테마체험전시관 가까이 숲속에 정극인의 동상과 상춘곡 시비가 세워져 있다. 상춘곡 둘레길은 이곳에서부터 오솔길로 성황산을 올라가서 무성서원으로 내려가는 코스로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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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극인 동상 ⓒ 이완우

 
정극인은 1437년(세종 19년)에 성균관 유생일 때 척불 항쟁의 중심에서 유생들의 권당을 주도하였다. 그는 이 일로 유배 되었고 유배를 마친 후에 이곳으로 와서 초가삼간을 짓고 '불우헌(不憂軒)'이라 이름 지어 은둔하였다.

그는 서릿발 같은 기개로 행동하는 당찬 선비였다. 1453년(단종 1년)에 과거에 합격(53세)하여 관직에 있다가 단종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여 이곳에 다시 은거하였다. 1472년(성종 1년)에는 관직에서 은퇴하여 세번 째로 돌아와 한글 가사 '상춘곡(賞春曲)'을 짓고 안빈낙도하며 태인학당을 열었다.

상춘곡 둘레길에 있는 정자인 한정(閒亭)에는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1493~1582)의 오언율시가 전해 온다. 이 한시에 드러나는 풍류와 당찬 기백은 불우헌 정극인의 <상춘곡> 영향을 받았음을 느낄 수 있다.  

불견차옹구(不見此翁久) 이 늙은이가 오랫동안 오지 않아서,
치양고폐천(稚楊高蔽川) 어린 버드나무가 거목 되어 냇가를 덮었네.
근해필부후(筋骸匹夫後) 늙은 몸의 필부가 되었으나,
담기만인전(膽氣萬人前) 기백은 만 사람 앞이라도 서겠네.
세사포용리(世事抛慵裏) 세상일은 게을러서 포기했으니,
산풍인취변(山風引醉邊) 산바람이 취할 정도로 끌어당니네.
음시환비력(吟詩還費力) 시를 읊는 것도 쓸데 없는 일이라서,
묵묵와간천(默默臥看天) 조용히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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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극인 가사 <상춘곡> 시비 ⓒ 이완우

 
조릿대 숲이 울창하고 활엽수의 녹음이 푸르러져 가는 상춘곡 둘레길을 걸으며, 유학자인 불우헌 정극인과 면앙정 송순 등이 우수한 한글 작품을 이 지역에서 남긴 것이 면면히 이어 내려온 역사 문화적 토양에 바탕을 두었음을 확인한다.


숭정대부 종1품으로 왕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 1439~1512)은 이 지역 정읍 옹동면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는 1493년(성종 24년)에 장악원 제조의 직책으로 조선 시대의 의궤와 악보를 정리하여 악서(樂書)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하는데 중심 역할을 하였다. 그는 <동동>, <정읍>, <처용가> 등의 전래 노래를 향악(鄕樂)으로 분류하여 한글로 악학궤범에 실었는데, <정읍>은 조선 시대 궁중 아악 수제천(壽齊天)으로 연주되어 백제 음악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역사학자 권희덕(전주 호성동)씨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 용비어천가와 여민락 등을 지을 때, 이 지역 출신인 최항, 안의, 권제와 동부승지 권채가 적극 협력하였다고 한다. 수양대군이 이곳 정읍 칠보면에 거주하면서 상두산 사찰에서 한글 불경 책을 쉽게 개조하여 다듬어서 <월인천강지곡>과 <월인석보>를 직접 지어냈다고 한다. 정읍 칠보 지역은 한글 창제에 큰 역할을 하였고, 한글 활용의 전통이 일찍부터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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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촌마을 성황산 <상춘곡> 둘레길 ⓒ 이완우

 
상춘곡 둘레길에 있는 송정(松亭)은 조선 중기의 무신인 정걸(丁傑, 1514~1597) 장군이 머물던 정자이다. 그는 임진왜란 이전에 수군절도사로서 을묘왜변 등 많은 전투에서 왜구를 무찌른 명장이었다. 그는 임진왜란(1592년) 때 79세로서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보다 31세 연상이었지만, 한산도 통제영의 이순신 장군을 보좌하며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정걸 장군은 정극인의 5세손이다. 이순신 장군은 정걸 장군을 삼고초려하였고, 정걸 장군은 전라 좌수사 조방장(助防將, 참모장)이 되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2년 전인 1589년에 이 지역 태인 현감을 겸임한 정읍 현감으로 부임했다. 조선 조정은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를 일으켜, 대동계를 조직하여 양반과 평민이 단결하여 왜구를 무찌르며 세력이 커지는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을 모반죄로 제거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정여립 군사력의 바탕이 되는 태인 지역의 민심을 안정시키고, 정여립의 군사적 자산을 인수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상춘곡 둘레길의 오르막 전망 좋은 곳에 상춘정(賞春亭)에서 멀리 동진강의 강줄기를 바라본다. 숲의 녹음이 무성하여 전망은 탁 트이지 않았으니, 선인들의 호연지기는 충분히 느껴졌다. 상춘곡 둘레길은 무성서원 현가루(絃歌樓) 앞에 이르렀다. 

현가루!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부르는 누각. 무성서원의 정문 역할을 하는 현가루는 최치원((崔致遠, 857~908?)으로부터 전래하는 서정적인 풍류와 상무적인 기백이 함께하는 풍류도를 계승하고 있었다. 정극인의 상춘곡 둘레길을 걸으며, 한글 가사 <상춘곡>이 최치원의 부드러우면서 강한 풍류도가 유교적 선비의 시가 형식으로 표현된 작품이라고 여겨졌다.

답청(踏靑)으란 오ᄂᆞᆯ ᄒᆞ고 욕기(浴沂)란 내일(來日)ᄒᆞ새
아ᄎᆞᆷ에 채산(採山)ᄒᆞ고 나조ᄒᆡ 조수(釣水)ᄒᆞ새
(풀 밟기는 오늘하고, 물놀이는 내일 하세. 
아침에는 산에서 나물 캐고, 저녁에는 낚시하세.)
- <상춘곡> 가사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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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상춘곡> 내용 벽화, 정읍 태인면 원촌마을 골목길 ⓒ 이완우

 
#정극인상춘곡 #정읍성황산 #성황산상춘곡둘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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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역사 문화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여행의 풍경에 이야기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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