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그때도 오늘' 첫 번째 에피소드, 1920년대 경성 남자 1과 남자 2 독림군으로 활동하던 남자와 독립군의 심부름을 하던 남자가 붙잡혀서 서로 벽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 연극 '그때도 오늘' 첫 번째 에피소드, 1920년대 경성 남자 1과 남자 2 독림군으로 활동하던 남자와 독립군의 심부름을 하던 남자가 붙잡혀서 서로 벽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후배가 <그때도 오늘>이라는 연극을 보자고 했다. 제목이 끌렸다. 그때도 오늘이라, 그때가 언제인지 궁금했고 그때가 왜 오늘이라는 건지 오늘의 무엇과 그때의 무엇이 같아서 혹은 비슷해서 그런 제목을 썼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광주에서 서울 대학로까지 가서 연극을 보았다. 제목 말고 아는 거라곤 배우 이희준이 출연한다는 거였다.
 
연극 <그때도 오늘>은 남자 배우 두 명이 나오는 2인극이다. 이희준 말고도 최영준, 오의식, 박은석, 양경원, 차용학 배우가 나온다. 후배가 이희준이 출연하는 편을 보고 싶다고 해서 이희준이 나오는 날짜를 잡아서 표를 예매했다. 이희준은 남자 2였고, 남자 1은 오의식이었다. 2월에 종영한 MBC 드라마 <밤에 피는 꽃>에서 오의식의 연기를 흡족하게 보았던 차라 반가웠다.

무대 뒤쪽 오른편에 아주 커다란 달이 있다. 구름이 달을 약간 가리고 있다. 사극인 걸까? 저 달은 왜 저렇게 크게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 의문은 또 있다. 달 아래로 나무들이 숲처럼 있는데, 비스듬히 잘려서 무대 오른쪽 뒤는 까만 바탕이 드러나 있다. 궁금하다. 의도가 다분한 무대 세트인 것 같아서 말이다. 무대 한가운데는 낮은 벽 같은 것이 있고, 양쪽으로 의자가 하나씩 있다. 분단에 관한 연극일까? 휴전 국가에 사는,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토가 양분된 곳에 태어난 자의 자의식이 발동했다.

<그때도 오늘>은 총 네 개의 에피소드가 옴니버스로 연결된 극이다. 처음 무대는 1920년대 경성이다. 비스듬히 잘린 나무들 머리 위로 까만 바탕에 시대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이 글로 나온다. 무대를 그렇게 만든 이유가 나오는 순간이었다. 벽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 의자에 남자 1(오의식)이 앉고, 왼쪽에는 남자 2(이희준)가 앉는다.

남자 1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 온 평양 청년이다. 남자 2는 독립군의 심부름을 하다가 끌려 왔다. 둘은 벽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남자 1이 평양냉면에 대한 자부심을 한껏 드러내고 있는데, 평양냉면 심심해서 무슨 맛으로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먹고 나면 함흥냉면이 떠오른다고 하는 남자 2에게 세 번은 먹어야 하니 자기 집에 오면 평양냉면의 참맛을 알게 해주겠다고 하고 있는데, 시간이 된다. 그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걸었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시간이.    

두 번째 무대는 1940년대 제주도 중산간이 배경이다. 한마을 친구인 남자 1과 2는 진짜 제주도 말로 연기한다. 나무들 머리 위로 제주도 사투리를 표준어로 고친 대사가 자막으로 뜬다. 대사 보느라 연기 보느라 약간 정신은 없지만, 그런대로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 많이 불편하지는 않다. 배우 오의식의 제주도 사투리 구사가 정말 자연스러워서 감탄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제주도 출신이다. 그래서였을까. 4.3 사건을 표현하는 연기도 참 훌륭했다.
 
1940년대 중산간. 한마을에서 나고 자란 사섭과 윤삼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사상 싸움에 휘말리는 사섭과 윤삼.

▲ 1940년대 중산간. 한마을에서 나고 자란 사섭과 윤삼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사상 싸움에 휘말리는 사섭과 윤삼. ⓒ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네 개의 옴니버스 중에서 가장 연극적이라고 느낀 에피소드였다. 단출한 구성이지만, 발단과 전개, 위기, 절정, 결말까지 하나의 짧은 장면에 다 담겨 있었다. 확장해서 하나의 단독 극으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고 느꼈다. 짐을 싸서 피하라는 친구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결국 총에 맞는 사섭(오의식)과 살려달라는 애원에도 불구하고 여지없이 총알을 맞는 윤삼(이희준)까지, 제주도민의 대다수가 죽음을 면치 못했다는 4.3 사건의 핵심을 잘 묘파해서 가슴이 먹먹했다.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던 그들을 죽일 권리는 누가 누구에게 준 것이란 말인가.

세 번째 에피소드의 배경은 유치장이다. 1980년대 부산이다. 술을 먹고 싸우다가 잡혀 들어온 남자(이희준)는 하나밖에 없는 모포를 덮고 누워 있는 남자에게 시비를 건다. 경찰서 안의 TV에서는 아마도 광주의 시위 소식(5.18 광주민주화항쟁)을 전하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누워 있던 남자는 동료들의 거취를 다 불고 자책감에 시달리는 대학생이다. 대학생은 조용히 있고 싶어하고 취객은 계속 시끄럽게 떠든다.
 
연극 '그때도 오늘' 세 번째 에피소드 1980년대 부산 유치장에서 만난 두 남자. 알고보니 서로 아는 사인인데

▲ 연극 '그때도 오늘' 세 번째 에피소드 1980년대 부산 유치장에서 만난 두 남자. 알고보니 서로 아는 사인인데 ⓒ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이 세 번째 에피소드는 첫 번째 에피소드와 연결된다. 1920년대 경성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음에 이르는 남자는 일본인 여자를 사랑했다. 그 일본인 여자가 낳은 아들이 바로 취객이다. 뭐, 꼭 그렇다고는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나왔던 사랑 이야기가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연결되는 것은 사실이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2020년대 최전방에서 일어나는 일로 구성되었다. 어린 군인 두 명이 실탄이 장전된 총을 들고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둘은 친구지만 입대 시기가 달라서 한 명은 선임이고 한 명은 후임이다. 후임은 아직 군기가 덜 든 상태다. 선임은 그런 친구가 안타깝다. 군대에서 졸병이 해서는 안 되는 여러 가지 일을 일러준다. 축구 할 때 졸병은 골을 넣으면 안 된다든가 하는 거 말이다. 군대에서 생활한 적이 없어서 네 번째 에피소드의 내용이 흥미롭다. 실제로 저런가 싶다.
 
연극 '그때도 오늘' 네 번째 에피소드 2020년대 최전방. 군대에서 선임과 후임으로 만난 두 친구. 우리는 왜 오늘 이 자리에서 이러고 있는 것일까?

▲ 연극 '그때도 오늘' 네 번째 에피소드 2020년대 최전방. 군대에서 선임과 후임으로 만난 두 친구. 우리는 왜 오늘 이 자리에서 이러고 있는 것일까? ⓒ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비교적 현대의 일이고, 군대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중심이라 그런지 웃는 관객이 많다. 하지만, 우리(남쪽의 병사들)도, 저쪽(북한 병사들)도 이 시간 이 장소에서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모른다. 이런 상황은 대체 누가 만들었고 우리는(남쪽과 북쪽)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 것일까. 묵직한 화두가 가벼운 웃음 사이로 던져진다. 웃음 끝에 진지한 분위기가 먼지처럼 가라앉는다.

이번 <그때도 오늘>은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작품이었다. 간다(簡多)는 한자로는 '지나친 포장이 없는 간략하고 좋은 공연, 그리고 다양한 형식의 공연을 하겠다는 마음을 담은 이름'이라고 한다. 한글로는 관객을 기다리기만 하기보다는 관객을 직접 찾아 공연을 배달하겠다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이런 의미를 내포한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는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들이 만든 극단으로 벌써 20주년을 맞았다.

<그때도 오늘>은 형식으로만 보면 한국근현대사의 질곡을 굵직굵직한 사건들로 징검다리 만들 듯이 엮어 보여주고 있다. 이런 종류의 '역사물'을 못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영화 <서울의 봄>도 심지어 영화 <파묘>도 관람을 포기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에게는 작품에서 보여주는 한국의 근현대사가 차마 보기 어려운 어떤 지점들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역사물'을 보기는 한다. 하지만 가끔 역사의 흐름을 보여주려다가 학교나 공공시설에서 상연했으면 알맞겠다 싶게 교육극이 되어 버리는 경우나, 작품의 메시지가 너무 강해서 프로파간다의 성격이 치우치게 나오는 경우는 나도 싫다.

<그때도 오늘>은 그렇지 않아서 좋았다. 일반 관객의 리뷰 중에는 이 연극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는 것도 있는데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만, 이 연극이 교육극 성격이 강하거나 프로파간다적 특징이 우세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때도 오늘>은 좋은 연극 무대였다.

특히 좋았던 것은 하나의 장면이 끝날 때마다 배우 두 명이 어둠 속에서 서로 포옹하는 것이었다. 연극에서 미처 말하지 못했던 부분, 결여되었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그 포옹을 통해서 가득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호흡과 호흡이 서로 긴밀하게 길항해야 하는 무대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배우 간의 포옹은 낯설지만 기분 좋은 느낌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아직 오지 않은 '오늘'을 우리는 '내일'이라고 지칭하지만, 그 내일이 되면 '오늘'이다. <그때도 오늘>이라는 연극 제목은 그런 의미에서 붙여진 건 아닌지 생각해보았다. 그때, 1920년 일제강점기에도, 1940년 해방 이후의 지독한 현실 속에서도, 1980년대의 엄혹한 시절에도, 분단과 휴전의 상흔이 여전히 젊은이들을 모순된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 지금에도 오늘은 언제나 오늘이고, 우리는 진지하고 치열하게 이 오늘을 살아간다.

광주로 오는 기차 안에서 마지막으로 달에 대해 생각했다. 달은 왜 그렇게 크고 휘영청 떠서 발아래 인간들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된 조국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독립군도 자신이 자부심을 느끼는 고향 음식 이야기에는 발끈하고, 농사지어 가족과 함께 근근이 먹고 살아가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는 평범한 농부가 자신은 잘 알지도 못하는 사상(思想) 싸움에 휘말려 덧없이 죽어가고, 국가폭력에 대항하는 일반 시민들의 시위를 폭도라 칭하며 비하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비루하고 고난의 연속인 소시민, 서로 총을 쏘면 맞아 죽을 수 있는 거리에서 서로가 서로를 겨누고 있는 원래는 같은 나라 사람이었던 젊은이들을 달은 무슨 생각을 하며 보고 있을까.

<그때도 오늘>이라는 연극이 달이라고 하는 무심한 사물을 등장시켜서 인간들의 모든 짓이 자연 만물 앞에 헛되다고 하는 사상을 전파하려 했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커다랗고 밝은 달을 무대에 등장시켜 모든 장면에 거기 있게 함으로써 일종의 숭고(崇高)를 느끼게 했다고 본다. 인간은 자신의 역량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에서 숭고를 느낀다. 해돋이나 거대한 바다 같은 것에서 말이다. 물론 이런 자연 현상뿐만 아니라 다른 것에서도 숭고는 존재한다.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에게서도 우리는 숭고를 느낀다. 윤리적 숭고라고 할 수 있다. 꼭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지금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 모두 숭고한 것 아닐까? <그때도 오늘>에서 달은 1920년대부터 현대까지 계속 그 자리에 있으면서 어떤 숭고를 표상하고 있었고, '오늘'을 치열하고 진지하게 살아가는 인간들의 숭고도 거기 함께 자리했었다고 믿는다.

<그때도 오늘>은 이희준, 오의식 두 배우 간의 합이 너무 좋았고, 별다른 화려한 무대 장치 없이도 대사와 연기만으로 집중력을 끌어내는 작품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보고 싶어지는 연극이었다. 서울시민이었다면 정말 그랬을 것 같다. 지방민인 것이 한탄스럽다. 대신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가 다른 작품을 올린다고 하면 무조건 달려가서 볼 생각이다.
연극그때도오늘 공연배달서비스간다 이희준 오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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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글쓰기를 사랑하며 평화로운 삶을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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