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듄: 파트2>의 스틸 이미지

영화 <듄: 파트2>의 스틸 이미지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듄: 파트2>라는 영화를 아이맥스관에서 본다. 전에 <듄: 파트1>을 봤지만, 기억이 잘나지 않아서 <듄: 파트2>를 보기 전에 복습 개념으로 <듄: 파트1>을 다시 볼까도 생각했다가 그냥 극장에 왔는데, 괜찮았다. 파트1을 몰라도 영화의 서사를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 폴(티모시 샬라메)이라는 주인공이 사막에 사는 사람들의 영웅이 되고 심지어 구세주(메시아)로 부상하면서 황제를 죽이고 새로운 황제가 된다는 내용이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묘사되는 '사막'에 사는 사람들의 정체가 궁금하지만, 파트1에서 나왔는데 내가 기억 못하는 걸로 치부하고 그냥 본다.

폴의 성장 과정, 사막의 사람들에게 전사로서 인정받고 종교적 의미의 구원자로까지 진행되는 서사, 거기에다 진실해 보이는 사랑 이야기까지는 잘 따라갔는데, 황제의 군대와 사막의 사람들(폴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전쟁하는 장면이 시작되자 약간 지루해진다. 서로 싸우고 죽이는 장면을 잘 보지 못하는 개인적 취향 탓이다. 하지만 아이맥스의 커다란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쟁 장면이 대단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문득 나 말고 다른 사람들, 그중에서도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 특별히 젊은 세대는 이 영화의 이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해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렇게만 '전쟁'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지 말이다. 나도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다. 20대에 이러저러한 시위를 하면서 '전쟁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경험했지만 진짜 전쟁은 모른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소식을 미디어를 통해 전해 듣고 보지만, 나 개인의 구체적 체험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무지하게 큰 스크린에서 보여주는 마치 일종의 컴퓨터 게임 같은 저 전쟁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은 무얼 느낄까? 갑자기 하염없이 궁금해졌다.

폴은 아버지를 포함해서 가문의 사람들을 통째로 잃었다. 황제에게 말이다. 그래서 폴이 황제의 군대를 치고 황제를 죽이고 새로운 황제가 되는 것은 개인적인 복수심의 발로이기도 하다. 그 개인적 사정과 대의가 맞물린다. '사막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오랜 세월 기다려왔다. 폴은 여러 면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구세주 상에 들어맞는다. 폴은 사실 그것을 두려워하고 거부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자신은 그저 전사의 일원일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폴은 사람들의 이미지와 의사를 받아들이고 그들이 원하는 일을 하는데 개인적인 복수도 함께 한 셈이 되었다. 복수가 먼저였는지, 사람들의 소망을 들어주는 일이 우선이었는지는 일단은 모르겠다. 영화의 러닝 타임상 이제 끝날 때가 되었는데도 마땅한 결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설마 파트3가 나온다는 건가'라고 생각하면서 초조해하고 있는데 역시나 영화는 다음 편을 예고하는 장면으로 끝났다. 이런, 또 봐야 하는구나!

나와 함께 <듄: 파트1>을 보았던 친구 말로는 내가 <듄: 파트1>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메시아나 인류의 구원, 이런 내용을 개인적으로 싫어한다고 내가 말했다는 것이다. 흠, 그랬구나. 그랬나 보구나. 내가 그런 것을 싫어하는 모양이구나. 새삼 깨달음이 왔다. 아마도 그래서 <듄: 파트1>을 보고는 리뷰 따위 쓸 생각이 없었나 보다. 그래서 <듄: 파트2>도 차일피일 미루며 보지 않았나 보다. 만약 극장에서 <듄: 파트2>를 다시 상영한다는 것을 몰랐다면, 나는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 영화를 극장에서 다시 틀어주면서 그 정보를 친구가 전해주면서 같이 보지 않겠냐고 기왕에 보는 거 아이맥스에서 큰 스크린으로 보지 않겠냐고 해서 보게 된 <듄: 파트2>였다.

<듄: 파트2>를 보고 전쟁 장면에서 생각이 많아지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사막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쏠리면서, 폴(메시아?)을 사랑하지만, 어쩌면 함께 할 수 없는 여인 챠니(젠데이아 콜먼)의 운명이 궁금해지면서 나는 이제 <듄: 파트3>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거기다 '프랭크 허버트의 원작 소설을 읽어야 하나'라는 고민까지 더해졌다. 사후 복습 겸 파트3에 대한 예습으로 <듄: 파트1>을 다시 보는 건 덤이라고 해야 할까.

전쟁이란 권력과 힘(폭력)이 바탕이 되는 싸움이고, 대저 가진 자들이 더 가지기 위해 혹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가지지 못한 자 혹은 덜 가진 자들을 힘으로 핍박하여 누르는 것이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가지면서 여하한 종류의 폭력을 싫어하고 지양하는 나로서는 전쟁이 싫다. 하지만 혹시 전쟁은 인간의 또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의 DNA에 새겨져 있는 원초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휴전 국가에, 이 지구상에서 어쩌면 약자에 속하는 아시아의 한구석에 사는 나로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번 <듄: 파트2>에서 '성전'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심경은 더 복잡해졌는데, 성전이라니 전쟁과 종교가 합쳐지다니. 아무래도 프랭크 허버트의 소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든다. 물론 방대한 내용의 소설을 완성하지 못하고 작가가 영면해버려서 한계는 있겠지만, 실마리는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삶에 대해서. 인간과 전쟁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전쟁을 실제로 알지 못하는 내가 말이다. 이 모든 상황에서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영화가 파트3로 끝난다는 소식이다. 러닝 타임이 3시간이 넘어가는 영화를 본다는 것은 체력의 한계가 명백한 늙은 인간인 나에게는 아무래도 고통스러운 부분이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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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글쓰기를 사랑하며 평화로운 삶을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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