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진스의 선공개 싱글 'Bubble Gum'  스틸컷. 뮤직비디오는 1980, 1990년대 오브제로 가득하다

뉴진스의 선공개 싱글 'Bubble Gum' 스틸컷. 뮤직비디오는 1980, 1990년대 오브제로 가득하다 ⓒ ADORE

 
음악 외적으로 큰 이슈가 된 가운데, 뉴진스는 오는 24일에 발표할 더블싱글 중 하나인 'Bubble Gum' 뮤직비디오를 지난 4월 27일 선공개했다. 뮤직비디오 속 세계는 'Ditto'부터 쭉 이어져 온, 창작자가 선호하는 문화적 레퍼런스가 응축된 괴이한 공간이다. 휴대폰 등 최신 문물이 최대한 배제된 세상. 캠코더로 녹화되어 노이즈 낀 브라운관에 다시 재생되는 기억들. 뮤직비디오에서 1980, 1990년대 문화적 레퍼런스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 뉴진스는 사람들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며 관심을 받았고, 이번에 공개한 뮤직비디오 역시 이러한 활동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시티팝은 추억과 닮아있다

유독 특이하게 다가오는 건 음악이다. 그간 뉴진스는 과거의 문화적 양식을 모티브 삼아 이를 시각적으로 재현하거나 재해석해 왔다. 그런데 음악만큼은 최신을 지향했다. 저지 클럽, 드럼 앤 베이스 등 최근 음악계에서 주목받는 장르의 사운드를 차용했다. 트렌디한 사운드를 줄곧 만들어온 뉴진스에게 'Bubble Gum'은 이질적인 음악이고, 이 음악을 들으면 누구나 쉽게 '시티팝'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일본 활동과 CM송을 염두한 선택일 것이다.)

이제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음악인 시티팝은 사실 1990년대 일본 음악의 트렌드였던 '시부야케이'처럼, 근원을 파고들어 갈수록 제대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모호한 장르다. 시티팝은 소위 웨스트코스트 AOR, Acid Jazz, 신스팝 등 전혀 연관성 없어 보이는 장르들을 혼용했던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티팝의 근원은 어쩌면 아무것도 없는 빈 껍데기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티팝이 갖고 있는 모호성이야말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매력이 아닐까.

시티팝은 그 음악이 탄생한 시기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과거에 머물러 있는 장르였다. 어쩌다 레트로 열풍에 휩쓸려 다시 재조명받기 시작한 이 음악은 자연스럽게 과거를 그리워하는 정서를 품으며 듣는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그게 설령 시티팝의 태동기에 태어나지도 않았고 유년시절에 시티팝을 접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말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이미 흘려보낸 과거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시티팝이라는 모호한 음악을 재조명시키는 원동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과거는 매 순간 뉴진스의 뮤직비디오처럼 캠코더로 녹화되는 게 아니라서 머리에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는다. 그저 남겨진 기억의 파편을 얼기설기 이어 붙여 과거를 아련했던 시간으로 되새김질할 뿐이다. 여기엔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슬픔, 환희로 가득 찬 행복이 제멋대로 엮여 있다. 우리는 그 기억을 아련한 추억으로 남기며 종종 떠올린다. 그리고 뉴진스는 1980, 1990년대 문화로 재조립된 세계에서 천진하게 비눗방울을 불면서 놀고, 이제는 접하기 어려운 VHS를 돌려 본다. 그리고 자신들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 손짓한다. 이렇게 아름답고 처연한 추억의 세계에 잠깐 머물다 가라고.

내게 존재하지도 않았던 과거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방법
 
 뉴진스의 선공개 싱글 'Bubble Gum'  스틸컷. 추억의 힘을 강하게 건드리는 민희진의 세계에서 뉴진스는 성실히 연기하고 있다.

뉴진스의 선공개 싱글 'Bubble Gum' 스틸컷. 추억의 힘을 강하게 건드리는 민희진의 세계에서 뉴진스는 성실히 연기하고 있다. ⓒ 어도어뮤직

 
2022년 뉴진스의 성공적인 데뷔는 아이돌 산업, 특히 여성 아이돌의 이미지 메이킹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줄곧 걸크러시 혹은 남성의 기억에 자리잡은 이상적인 청순의 이미지를 차용했던 걸그룹 시장에서 뉴진스의 등장은 흐름을 바꿨다. 그들은 뉴진스의 성공을 '천진한 소녀', '레트로'라는 키워드로 분석했고, 키워드에 걸맞은 콘셉트를 가져왔다. 과거의 문화적 레퍼런스를 나열하고 전시하는 데에 치중한 것이다.

하지만 뉴진스는 레트로에 천착하는 게 아니다. 정확히는 과거의 문화를 재현하는 게 아니라, 과거를 대표하는 오브제 주변에서 그것들을 대하는 태도를 연기하는 쪽에 가깝다. 뉴진스를 지켜보는 대다수가 여름의 입구에 서서 바닷가를 거닐거나 햇살을 맞지 않았고, 그들처럼 시답잖은 놀이를 하면서 유년시절을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뉴진스는 그걸 능청스럽게 행한다. 비록 내가 진짜로 지나쳐온 시간은 아니었겠지만, 그 시절 내내 상상해왔던 이상적인 기억들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연기는 어느 순간부터 현실을 침범하며 그것이 진짜로 현실에 존재했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뉴진스가 사람들에게 없던 과거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거짓 세계를 믿도록 만드는 건 쉽지 않다. 이걸 가능하게 하는 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다. 뉴진스를 바라보는 카메라에는 관음증적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다. 카메라는 아이돌의 특정 신체를 전시하거나 그들의 행위를 거리를 둔 채로 관찰하는 절대자의 위치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들 무리에 속한 하나의 인격체처럼 위치한다. 카메라를 바라보고 정제된 연기를 하며 노래하지 않고 친구들이 서로의 모습을 찍다가 웃어버리는 상황들 말이다. 이것은 추측하건대 뉴진스가 머물고 있는 세계를 구현하고 있는 창작자의 시선과 일치할 것 같다.

물론 현실은 냉혹하다. 큰 자본이 투입된 아이돌은 필연적으로 판매되어야 할 상품 중 하나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상품을 어떻게 포장하고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큰 차이를 만든다. 사랑과 증오가 사실 한몸이듯, 추악함과 아름다움은 고작 한 끗 차이에 불과하듯 말이다. 거짓 세계를 만든 창작자는 뉴진스를 물화시키기보다는, 자기가 꾸며놓은 거짓 세계 위에 서있는 배우로 대한다. 예술은 환상을 파는 영역이고, 아이돌을 '몇 가지 레퍼런스 엮어서 판매할 물건'으로 치부하는 집단에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짓된 세계를 만든 민희진은 추억의 강렬함을 알고 있고, 아름다운 거짓으로 꾸며진 세계를 추억하게 만드는 뉴진스는 그 어떤 공산품보다 강렬하게 우리의 일상에 뿌리를 내린다. 뉴진스의 거짓말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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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 노동자. 그리고 플랫폼 노동자. 사회와 문화의 전반적인 감상을 글로 남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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