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14 16:01최종 업데이트 23.12.14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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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의 모습 ⓒ 위키미디어 공용

 
민주노총 화물연대가 안전운임제 법제화와 적용 품목 확대를 촉구하며 파업 중이던 지난해 12월 4일, 윤석열 대통령은 관계장관 대책회의에서 화물연대 파업을 "범죄행위"로 규정하면서 "근로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파업으로 볼 수밖에 없다"라고 발언했다.

노동자들의 운동을 정치 파업으로 규정하는 이런 언급은 노동운동을 억압해 온 역대 정권의 상투적인 태도와 맞닿아 있다. 다만 발언의 의도와는 별개로, 완전히 틀린 말이라고는 볼 수 없을 듯하다. 


노동 조건이 노동자와 기업의 자유계약으로만 결정된다면, 노동조합이나 그 연합기구가 정치권력과 충돌하는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노동 조건이 정치와 법률에 의해서도 규제되고 국가권력이 노사관계에 불공정한 방법으로 개입하기 때문에, 노동자의 운동은 기업뿐 아니라 정치 영역을 상대로도 전개될 수밖에 없다. 

일제하의 노동운동 역시 한국인 노동자를 억압하고 일본인 자본가를 편드는 일제 국가권력에 대한 항거의 성격을 띠었다. 그런 억압을 해소하는 근원적 방법은 일제 국가권력을 축출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항일운동이자 독립운동이며 정치운동이었다.

보수세력은 대한민국 정권하의 노동운동은 정치운동으로 쉽사리 규정하면서도, 일제하 노동운동은 좀처럼 그렇게 규정하지 않는다. 일제하 노동운동을 정치운동으로 인정하게 되면 이를 항일운동 혹은 독립운동으로 인정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수많은 노동운동가들을 독립유공자로 받들어야 하는 '이념상의 혼란'이 발생한다.

공산주의 항일투쟁 이끌어... 이승엽의 활약상

항일투쟁을 겸하는 그 같은 일제하 노동운동의 성격을 보여준 인물이 있다. 공산당 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이승엽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승엽은 3·1운동 11주년인 1930년 3·1절을 맞아 두 가지 격문을 제작했다. 그중 하나인 '3·1운동 11주년을 기하여 전조선 노력대중에게 격함'을 보면, 그를 비롯한 이 시기 노동운동가들의 관심사가 노동운동뿐 아니라 항일투쟁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94년에 <황해문화> 제5호에 실린 이현주 인하대 강사의 논문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가로지른 남로당의 2인자 - 이승엽에 대하여'에 인용된 위 격문의 처음 2개 항목은 "조선 절대독립 완성"과 "타도 일본제국주의"다. 그런 다음에 "8시간 노동제 실시"가 나온다. 이 외에도 "제국주의 전쟁을 식민지 해방투쟁으로", "3월 1일을 반제국주의의 날로" 등등의 민족주의적 구호가 나온다.

하지만 이승엽과 그의 동료들이 독립운동가라는 점은 지금은 물론이고 그때도 제대로 부각되지 않았다. "리승엽에 대하여는 그가 동 사건에 주모자인 만큼"이라는 문구가 담긴 1930년 3월 13일 자 <동아일보> 2면 중간 기사는 "조선의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공산주의 신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등의 불온격문을 수천 장 등사하야 삼월 일일을 긔회로 일대 민주적 대운동을 일으키랴 하야"라고 보도했다. 이승엽 등이 사유재산제도에 도전한다는 점에 초점이 맞춰진 기사다.

이승엽은 1905년 2월 8일 경기도 부천군 성재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훗날 법정에서 자신을 뱃사공의 아들로 소개했다. 하지만, 위 논문에 따르면, 그의 인천상업학교 동창이자 절친인 임창복의 아들인 임명방 인하대 사학과 교수는 그가 어선을 여러 척 소유한 집에서 태어났다고 증언했다.

그가 역사 무대에 뛰어든 계기는 인천상업 재학 중인 1919년에 발생한 3·1운동이다. 14세 때 경험한 '대한독립 만세의 함성'은 그를 민족해방투쟁의 전사로 바꿔놓았다. 18세 때인 1923년에 조선공산당청년동맹에 가입하고, 그 뒤 인천을 무대로 항일노동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활동은 일찍부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1925년 3월 10일 자 <조선일보> '제물포 청년 총회'는 "인천에 잇는 제물포청년회에서는 기보(旣報)와 여(如)히 거(去)8일 하오 1시부터 정기총회를 열고 임시의장 이승엽 군의 사회로 수정규칙의 통과위원선거를 마치고 사업집행 방침 급(及) 기타 사항에 대하여 제반의견을 교환하고 폐회"하였다고 보도했다.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지난 8일 총회가 열려 사업방침과 기타 사항을 논의했다는 보도에서 느낄 수 있듯이, 20세 된 이승엽과 동료들은 언론의 관심 속에 인천 지역운동을 이끌었다. 청나라 및 일본 상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져 반외세 감정이 축적된 인천 지역에서 활동했고 이 시기가 공산주의운동의 초창기라서 중앙 언론의 주목을 일찍 받은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언론의 주목을 일찍 받은 만큼, 일본 경찰의 주목도 일찍 받았다. 21세 때인 1926년에 체포돼 1년 형을 받았고, 25세 때인 1930년에 위 전단지를 제작한 일로 인해 4년간 수감됐고, 32세 때인 1937년에 체포돼 1939년까지 복역했다. 18세 때 공산주의운동에 뛰어들어 34세가 될 때까지 총 7년 형을 받았으니, 청춘의 절반 가까이를 감옥에서 보낸 셈이 된다.

그는 1940년에도 예비검속 차원의 구속을 당했다. 조만간 발생할 위험을 예방한다는 명목으로도 일제가 그를 붙들어뒀던 것이다.

그가 21세 때인 1926년에 체포된 일은 한국 역사 속의 유명한 사건과 관련돼 있다. 순종황제의 장례식을 기해 발생한 6·10만세운동 때도 일제 경찰에 붙들렸다.

역사 저술가 안재성의 <박헌영 평전>은 이 운동을 이끈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관련해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고려공청의 지도 아래 사회과학 학습을 위해 1925년 9월에 결성한 반공개 조직으로 회원이 5백 명이 넘는 상당한 규모였다"고 설명한다. 조선공산당에 속한 고려공산청년회가 1926년판 3·1운동을 주도했던 것이다.

공산주의 항일 진영이 만세운동을 주도한 일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은 전국적인 사회주의자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이승엽도 광풍을 피하지 못했다. "수백 명 검거할 모양?"이라는 문구가 부제목에 들어 있는 1926년 7월 25일 자 <동아일보> 5면 우상단 기사는 "인천에서는 인천로동련맹 리승렵 씨가 톄포되야 종로서로 호송되여왓고"라고 보도했다.

전향선언, 그리고 '미제 간첩'이라는 오명
 

1925년 3월 10일자 <조선일보> '제물포 청년 총회'라는 기사에 언급된 이승엽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이처럼 항일운동으로 인해 거듭 수난을 겪던 이승엽은 일제강점 막판에 오점을 남겼다. 1940년에 검거된 뒤 전향선언을 한 일이 그것이다. 전향선언 뒤 그는 식량배급조합 이사 등을 지냈다. 그런데 전향선언과 부합되지 않는 사실관계들이 있다. 경성제국대학 강사 출신 공산주의자로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수감 생활을 한 김태준(1905~1949)의 기억에 따르면, 이승엽은 전향선언 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김태준의 옌안 여행기인 <연안행>에 "청진·일철을 중심한 이승렵 동무들의 기관지 <자유와 독립>을 가지고 온 김일수 동지를 만났다"는 대목이 있다. <자유와 독립>은 1943년에 조직된 공산주의자그룹의 기관지다. 전향선언 뒤에 이런 기관지를 만들었다면, 그 후에도 조직과 계속 관계가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위장전향 가능성을 언급한 이현주 논문에 인용된 청계연구소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에 따르면, 이승엽은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선언이 방송된 1945년 8월 15일 당일부터 조선공산당 재건에 착수했다. 그런 뒤 지도부 자리에 들어갔다. 전향선언 뒤에도 동료들과 계속 접촉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위 논문에 인용된 북한 자료인 '미제국주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전복 음모와 간첩사건 공판문헌'에 따르면, 이승엽 자신도 '전향선언 뒤에 박헌영을 만나 지하활동을 함께하자고 말했다'는 취지로 북한에서 진술한 일이 있다. 여러 정황을 보면 위장전향이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더라도 전향선언을 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승엽은 '조선의 레닌'으로 지칭될 정도로 모스크바의 신임을 두터이 받은 박헌영과 함께 해방정국에서 맹활약하며 남로당 2인자로 불렸다. 그러다가 미군정하에서 제약을 느끼고 1948년에 월북했다. 이북에 가서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사법상 등을 역임했다. 그 뒤 박헌영이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 밀리면서 이승엽도 반역자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는 박헌영과 함께 '미제 간첩'이라는 혐의를 받고 처형됐다. 

14세 때의 3·1운동을 계기로 역사 무대에 뛰어든 그의 맹렬한 삶은 48세 때 그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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