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존재했던 민간인 수용시설인 선감학원에서, 무고한 아동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조직적인 납치와 인권유린, 노동 착취가 벌어졌는데 이를 '선감학원 사건'이라 한다. 공식적으로 선감학원에 끌려온 것으로 확인된 피해자만 4689명에 이른다. 그 시절, 왜 보호받아야할 어린 아이들은 이유없이 끔찍한 '지옥도'에 끌려와서 악몽같은 생활을 겪어야만 했을까.
 
4월 18일 방송된 SBS 실화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에서는 '그 섬에 아이들이 있었다'편을 통하여 선감학원 사건의 진실과 우리 사회에 남긴 숙제를 조명했다.

'선감학원 사건'이 남긴 숙제
 
 SBS 실화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관련 이미지.

SBS 실화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관련 이미지. ⓒ SBS

 
2016년 7월,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한 야산에 굴착기까지 동원한 발굴이 진행된다. 땅속에서 나타난 것은 관도 없이 암매장된 어린이로 추정되는 유해와 신발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피해자 허일용씨는, 발견된 유해와 유품이 "우리 쌍둥이 형의 흔적같다"고 고백하며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그들 형제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시간은 1960년대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6살 쌍둥이였던 허일용 형제는 미아리에서 할머니와 거주하고 있었다. 어느 날 시장 구경을 나갔던 형제는 할머니의 손을 놓치고 길을 잃었다. 다행히 경찰을 만나 파출소로 가게 된 형제는 집이 미아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형제는 경찰들이 금방 집을 찾아줄 것이라고 믿고 안심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경찰은 형제를 집이 아닌 아동보호소로 보냈다. 얼마 뒤에 형제는 이번엔 배를 타고 다시 선감도로 이송된다. 허형제처럼 영문도 모르고 선감도에 끌려온 아이들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멀쩡히 부모가 있는 아이들이 끌려온 경우도 많았고, 심지어 경찰이 아이들을 유인하고 납치해서 데려온 경우도 있었다. 아이들을 강제로 선감도에 끌고간 정체불명의 어른들은 두려움에 우는 아이들에게 혹독한 매질을 가하며 위협했다.
 
아이들이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이 바로 선감학원이었다. 민간인 수용소인 선감학원은 원생들이 단체생활을 하면서 기술을 배우고 자립을 도와주는 사회 시설을 표방했다. 그리고 수용자들의 절반 이상은 7세에서 12세의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정작 이곳에 끌려온 아이들 중 학교에 가서 수업을 받은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남은 대부분의 아이들은 논일과 밭일, 염전 일 등에 투입되어 제대로 된 도구도 없이 맨손으로 온갖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목표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잔혹한 매질과 처벌이 이어지는 일상이 매일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노역으로 생산해낸 물자는 선감학원의 운영비로 사용됐다.
 
반면 성장기의 아이들을 위한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원생들을 강제로 삭발을 해야했고 의복과 신발은 몸에 맞지도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다수의 원생들은 좁은 공간에 갖혀서 숙식을 함께하며 철저한 통제를 받아야했다. 식사는 고작 소량의 꽁보리밥에 오래된 단무지, 맹물같은 국이 반찬의 전부였다고 한다.
 
원생들은 항상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고, 심지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흙을 퍼먹는 이들도 있었다. 또한 일부는 생을 포기하는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다.
 
생존한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초등학교 저학년의 아이들을 마치 성인 부리듯이 했다" "어리다고 보호받는 게 아니라, 체력이 약하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또다른 한 피해자는"제가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고 해도 그곳(선감학원)에서의 생활만큼 힘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끔찍했던 기억을 회상했다.
 
안타깝게도 허일용씨의 쌍둥이 형도 선감학원에서 사망했다. 굶어죽은 시신의 입에서는 충격적이게도 담요조각이 가득 나왔다고 한다. 극심한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여 사망직전에 담요를 뜯어서 먹은 것이었다. 동생 일용씨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오랫동안 형의 시신이 어디에 묻혀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무려 50여년이 지나서야 일용 씨는 형의 유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선감학원 측에 기록된 사망자의 숫자는 고작 20여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현재 발굴 결과 확인된 사망자만 150여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학원에서 강제노역과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사망한 이들의 시신은 대부분 인근에 유기되어 암매장되었다.
 
놀랍게도 이러한 만행이 공공연하게 벌어진 선감학원을 운영한 원장과 부원장의 진짜 정체는 모두 '공무원'들이었다. 선감학원의 운영주체가 바로 경기도였기 때문이다.
 
선감학원은 일제강점기부터 운영을 시작하여 군사정권 시절인 1982년까지 40여년 넘게 운영됐다. 거쳐간 원생의 숫자만 4689명에 이르렀다. 당시 경기도 선감학원 조례에 따르면, 학원의 설립목적은 '부랑아들의 구호 및 지도'에 있었다. 1958년 대한민국 정부는 '부랑아 보호책'을 제정하여 부모나 보호자의 곁을 떠나 거리에서 갈곳없이 떠돌아다니는 오갈데없는 아이들을 관리하기 위한 대책을 수립했다.
 
겉으로는 보호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부랑아들을 사회불안과 치안을 위협하는 예비 범죄자로 취급하여 '단속'하려는 것에 가까웠다. 국가가 부랑아로 낙인찍힌 이들을 수용소에 집어넣고 갱생시킨다는 선전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문제는 부랑아의 정의와 구체적인 단속 기준이 모호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자연히 무분별한 단속과 수용으로 이어졌고, 일용씨 형제처럼 멀쩡하게 부모가 있거나 실제 부랑아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가정의 아이들까지 머릿수를 채우기 위하여 강제로 '수집'되어 끌려온 경우가 속출했다.
 
이들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강제로 부랑아라는 낙인이 찍혔고, 당시 경찰과 공무원들은 단속해온 아이들의 신원이나 보호자 확인에 대한 절차도 지키지않고 엉터리로 처리한 경우가 많았다.
 
선감학원의 비극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SBS 실화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관련 이미지.

SBS 실화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관련 이미지. ⓒ SBS

 
이러한 선감학원의 비극은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왜 막지못한 것일까. 사실 선감학원의 문제점이 처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1950년대부터였다. 당시 이창식 기자는 1956년 내부 제보자를 통하여 가장 처음으로 선감학원의 비리를 제보받았다. 이 기자는 직접 현장을 방문하여 취재하거나 경기도지사와 함께 동행했던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몇 번에 걸쳐 선감학원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보도들이 나왔음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선감학원의 문제점을 앞장서서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사회와 국가에서 선감학원을 사실상 알고서도 묵인하고 방치했기 때문이다. 수용된 원생들은 '부랑아'라는 사회적 낙인에 묻혀서 피해자로서 받아야할 정당한 보호와 관심을 받지 못했다.
 
선감학원 사건을 취재해 온 하금철 전 기자는 "부랑아들이 정말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 자라나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시설에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건강하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재원을 투자하고 제도들을 만들었어야 했다"고 일침을 날렸다.
 
한편으로 원생들이 받은 피해는 수용 기간 동안에 당한 인권유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강제로 수용되는 삶 이외의 방식을 배우지 못하고 자라야했다. 간신히 도망을 가거나 정식으로 퇴소해 선감학원을 벗어난 이들도, 사회로 나와 돌아갈 곳이 없어 방황해야 했다. 국가가 부랑아를 관리하겠다고 만든 민간인 수용시설이, 오히려 평범하던 아이를 '진짜 부랑아'로 만들어버리는 모순을 초래한 것이다.
 
2022년 10월, 진실화해위원회는 "선감학원 사건은 국가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사건"으로 규정했다. 진화위는 법무부, 행정안전부, 보건복지부, 경찰, 경기도가 모두 인권유린이 책임이 있다는 판정을 내리고 공식사과를 권고하기도 했다. 진실이 밝혀지는 것과 더불어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과 회복은, 선감학원 사건의 진정한 마무리를 위하여 해결해야할 숙제로 남아있다.
 
대한민국 헌법 12조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구금-수색-심문-처벌과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고 명시되어있다. 누구도 절대로 빼앗을 수도 빼앗아서도 안 되는 그들의 권리이자 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선감학원의 피해자들은 이 당연한 권리와 삶을 누리지 못했다.
 
선감학원 피해자가 남겼다는 한 그림에서는 소년이 종이학을 타고 하늘을 훨훨 날아 선감도를 벗어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뭉클함을 자아낸다. 어쩌면 상상을 통해서라도 지옥같은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던 피해자의 간절한 염원을 표현했던 것이리라.

한 소년의 간절했던 꿈은 이뤄주지 못했지만, 다시는 이런 피해가 반복되지 않도록 '미래의 아이들'을 잘 지켜주는 일이야말로 현재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일 것이다.
꼬꼬무 선감학원사건 국가폭력 인권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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