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책 표지
 책 표지
ⓒ 한겨례출판

관련사진보기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란 책에는 속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속물'이란 말은 1820년에 영국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고 해요. 처음에 이 말은 높은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귀족과 귀족이 아닌 사람들을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었던 거죠.

그러다 이후 의미가 바뀌었는데, 이번엔 속물이란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됩니다. 계급이 낮은 사람을 보면 불쾌함을 느끼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건데요.

이후 그 의미가 확장돼 사회, 문화적 편견을 드러내는 모든 사람들을 속물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제 속물의 정의는 "하나의 가치 척도를 지나치게 떠벌이는 모든 사람"이 되었습니다. 외모면 외모, 돈이면 돈, 직업이면 직업, 학력이면 학력 등 어느 하나의 가치가 다른 모든 가치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속물이라는 거죠.

알랭 드 보통은 속물의 특징을 이렇게 봤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단순히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똑같이 본다는 것"에 있다고요. 속물적인 사람들은 상대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야 그의 인간적 가치를 비로소 인정해 준다는 겁니다.

그런데 알랭 드 보통은 지금 이 세계가 이러한 속물들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에서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갖은 애를 씁니다. 그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선 그들이 제시하는 기준에 우리 자신을 부합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다 그만 그들의 기준을 우리도 내면화하게 되고, 그렇게 우리마저 속물이 되고, 또 우리 자식에게 속물이 돼라 가르치게 되는 거죠. 정아은의 세태 소설 <모던 하트>는 바로 이런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학벌이 사회적 지위가 되다

<모던 하트>에서 사회적 지위는 학벌이 됩니다. 그것도 무조건, 학사 학벌이에요. 아무리 대학원을 하버드를 나와도, 대학교가 좋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합니다. 저자 정아은은 주인공 미연의 직업인 헤드헌터를 통해 이미 하나의 계급이 되어버린 학벌을 발판으로 더 높은 계급으로 올라서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좋은 기업은 좋은 학벌을 원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가. 능력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학벌이 좋지 않으면 뽑히지 않거든요. 외국계 회사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외국계 회사의 인사 부장이 좋은 학벌을 지닌 한국인이기 때문인데요. 그들이 그들만큼의 학벌을 지닌 사람을 원하는 이유는 뚜렷하진 않지만, 한편 매우 뚜렷하기도 합니다. 품격, 수준 같은 단어로 그 이유를 설명하더라구요.

헤드헌터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미연은 이런 세태가 탐탁지 않았습니다. 능력이 중요하지 그놈의 학벌 타령은! 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미연도 곧 이런 세태에 익숙해지게 됩니다.

소설 전체에서 미연은 '그렇게는' 속물적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처럼 결코 노골적이진 않죠. 하지만 그런 미연도 역시나 속물근성을 점차적으로 내면화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중심을 잡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속물적이지 않은 건 아닙니다. 미연도 결국엔 학벌을 따지게 됩니다.

물론 학벌은 그 사람이 지닌 끈기 같은 것, 지능 같은 것 등을 나타낼 수는 있습니다. 공부에서 이룬 성취가 그가 지닌 어떤 가치를 드러내준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학벌과 그 사람의 인간적 가치를 똑같이 볼 수는 없을 거예요. 오히려 똑같이 보려 했다가, 된통 혼이 날 수도 있습니다. 소설 속 세연과 세연 엄마처럼요.

미연의 동생 세연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남편을 맞습니다. 자랑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장모는 사위를 그냥 사위라고 부르지도 않아요. '우리 서울대 사위'예요. 그런데 그 서울대 사위가 정말, 정말 별로인 사람입니다.

사법고시를 통과 못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눈만 높아 다른 일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집에서 몇 년째 놀고만 있죠. 일만 거들떠보지 않는 게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자기를 위해 희생할 도구로 여기는 듯해요.

미연은 생각합니다. 세연 같이 똑똑한 애가 왜 저런 사람을 선택했을까. 세연의 업보일까도 싶습니다. "평생 등에 이고 다니면서 인내와 초월의 참의미를 깨달으라고 부처가 보낸 무거운 짐일까"도 싶구요.

그런데 그런 미연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미연도 속물적인 가치로 남자 친구를 택하고 있거든요. 자기 옆에서 자기만 바라보며 사랑해주는 경훈은 별로입니다. 이름도 모르는 지방대를 나왔다는 게 이유입니다. 그런 미연이 요즘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은 태환입니다. 학벌, 직업 다 마음에 듭니다. 거기다 잘생기기까지 했습니다.

미연의 태도에서 안타까웠던 점은 미연이 태환을 좋아하게 됐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학벌, 직업, 외모 다 좋은 남자, 마음이 끌릴 만합니다. 그런데 미연은 독자에게도 뻔히 보이듯 경훈과 있으면 기분이 좋고 행복합니다. 경훈과 만날 날이 되면 기대감에 부풀지요. 미연은 경훈과 있을 때 찬란히 빛나고, 아름다워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미연은 자신의 마음을 쉽게 알아채지 못합니다. 속물적 기준이 미연의 진짜 마음을 덮어 버렸기 때문이지요.

정아은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출신대학이 우리네 삶에 미치는 위력이, 모르는 척 아닌 척하면서 우리 모두 마음에 안고 가는 순위표가, 다양한 형태로 일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

작가의 말처럼 출신 대학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으로까지 침투해 온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일상 속에서 우리는 사랑도 하죠. 사랑의 힘과 학벌의 힘이 싸우니 소설 속에선 학벌이 이기고 말았습니다. 모던 하트, 현대를 사는 우리의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요.

덧붙이는 글 | <모던 하트>(정아은/한겨레출판/2013년 07월 12일/1만2천원)
개인 블로그에 중복게재합니다



모던 하트 - 제1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정아은 지음, 한겨레출판(2013)


태그:#정아은, #소설, #한국소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