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동학농민혁명 기록
▲ 혁명 사진  동학농민혁명 기록
ⓒ 허영진

관련사진보기

 
정부는 2019년 동학농민혁명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고 5월 11일에 기념식을 거행한다. 그리고 이날 각지에서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행사가 열린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1차동학농민혁명이 반봉건ㆍ반부패운동이었다면 2차동학농민혁명은 척왜척양의 항일구국의 반외세투쟁이었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는 항일투쟁을 전개한 최시형ㆍ전봉준ㆍ김개남 등 2차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에게 아직도 독립유공 서훈을 하지 않고 있다. 정부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2차동학농민혁명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이 계기가 되어 발발하였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겁박하여 포로로 삼고 친일정권을 강요했다. 일제가 본격적으로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사건이다. 일본군은 청일전쟁으로 청나라 군대를 조선에서 몰아내고, 동학농민군을 학살하면서 조선 지배를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동학지도부는 조선이 일본에 지배되지 않으려면, 침략자 일본군을 이땅에서 몰아내기로 결정했다.

전봉준은 일본군의 경복궁점령 소식을 같은 해 8월 전라도 남원 땅에서 들었다. 그는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1894년 10월 8일 전라도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동학농민군에게 다시 봉기할 것을 촉구하는 통문을 보냈다. 그러자 4천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모여들었다. 이후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동학의 2대교조 최시형은 10월 16일에 충북옥천 청산 문바위골에서 북접의 동학도에게 일본군을 몰아내라는 총기포령을 내렸다.
(출처: <식민지 조선의 농민운동>, 47쪽.) 2차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 최시형 선생(중앙)과 총사령관 전봉준 장군(오른쪽).
▲ 최제우, 최시형, 전봉준의 모습 (출처: <식민지 조선의 농민운동>, 47쪽.) 2차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 최시형 선생(중앙)과 총사령관 전봉준 장군(오른쪽).
ⓒ 역사공간

관련사진보기

 

1894년 10월 27일 일본 수상 이토 히로부미가 히로시마 대본영에서 병참총감 가와카미 소로쿠와 상의하고 조선의 동학농민군을 "모조리 죽이자"라는 살육전을 결정하였다. 이날 밤 대본영에 있던 가와카미 병참총감이 "향후 동학당을 모조리 살육할 것"이라는 훈령을 조선에 있는 일본군 남부병참감부와 인천병참감부에 내렸다.

같은 해 11월 7일 동학농민군 학살전담 현지사령관인 미나미 고시로가 인천병감부에서 이토 스케요시 사령관으로부터 "동학당을 죽여 없애라. 조선 군인(관군)을 지휘하라."라는 훈령을 받는다. 11월 12일 미나미 고시로는 3개 중대를 이끌고 용산을 출발하여 한강 이남으로 내려가, 동학농민군을 대대적으로 학살하였다. 학살은 이듬해 2월 21일 대둔산 전투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일본군에 의해 20~30만 명에 이르는 동학농민군이 학살되었다.
2015년 고 양상현 교수가 전봉준 사진을 발굴 공개함
▲ 전봉준 장군이 일본영사관에서 심문을 받은 뒤에 찍은 마지막 모습(1895년 2월 27일)  2015년 고 양상현 교수가 전봉준 사진을 발굴 공개함
ⓒ 양상현

관련사진보기

 
남접의 전봉준과 최시형의 명을 받은 북접의 손병희는 1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11월과 12월에 걸쳐 일본군과 일본군 편에 선 관군을 상대로 공주에서 최대의 전투(우금티 전투가 대표)를 치렀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배하였다. 12월 28일 밤에 전봉준은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되었다. 미나미 고시로는 1895년 1월 9일 나주 초토영에서 전봉준을 취조하고, 2월 18일 서울 일본영사관 순사청에 수감하였다.

재판이 진행될 때, 전봉준은 "일본은 곧 우리의 적국이다."고 말하고 '척왜'를 봉기 이유로 댔다. 전봉준은 4월 24일 의금부 전옥서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김개남은 재판도 없이 참수되었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하였다. 이 법은 대한민국 정부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의 명예회복에 앞장선다고 밝히고 있다.
김개남 장군
 김개남 장군
ⓒ 박도

관련사진보기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4조에 따르면,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그로 인하여 순국한 자(순국선열)"는 독립유공자가 된다. 이 법률에 의거하여,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명성황후 살해에 맞서 항거하다가 순국한 을미의병 참여자들은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을미의병 참여자였던 류인석, 이소응 선생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됨은 당연하다.
동학농민혁명군 최고 지도자 최시형
▲ 교수형 직전의 최시형 선생 동학농민혁명군 최고 지도자 최시형
ⓒ 박용규

관련사진보기

 

정부는 2차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최시형ㆍ전봉준ㆍ김개남 등에 대해 현재까지 독립유공 서훈을 하지 않고 있다. 1894년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일어난 2차동학농민군이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순국한 까닭에, 해당 법률대로 독립유공 포상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제라도 국가보훈처는 최시형ㆍ전봉준ㆍ김개남 등 2차동학농민혁명지도자들에게 독립유공 서훈을 했으면 한다.

지금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월 최시형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해월, #최시형평전, #최시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