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04 07:10최종 업데이트 23.12.04 07:10
  • 본문듣기

영화 <서울의 봄> 스틸 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저런 때려죽일 놈들!"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옆에 앉아있던 한 관객이 내뱉은 말이다. 쿠데타 성공을 자축하는 반란군들의 파티 모습과 그들에 맞서 싸운 이들이 붙잡혀 고문당하는 모습이 교차하는 장면에서다. 군가 '전선을 간다'에 맞춰 12.12 군사 반란 이후 부와 권력을 독식한 신군부의 행적이 자막으로 흐르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영화 <서울의 봄>은 여러모로 '불편한' 영화다. 오래되지 않은 역사 자체가 스포일러인 탓도 있지만, 불의가 정의를 무참히 짓밟는 과정을 지켜봐야 하는 게 고통스럽다. 오죽하면 관객들끼리 심장박동으로 스트레스 지수를 재는 챌린지까지 벌이겠는가. 개인적으로도 최근 가장 견디기 힘든 2시간 20분이었다.

내로라하는 초호화 캐스팅이지만, 배우들의 아우라가 느껴지진 않는다. 실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여서 그들의 연기보다 대사에 더 주목하게 된다. 더욱이 반란군과 진압군의 대비가 극명해 보는 내내 숨 돌릴 겨를조차 없다. 근래 제작된 영화 중 이처럼 내용부터 인물에 이르기까지 선악의 이분법으로 확연하게 갈리는 작품은 드물다.

이태신 수경사령관(정우성 분)을 정의로운 군인의 표상으로 설정한 까닭에 반란군의 수괴인 전두광(황정민 분)의 악행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영화의 결말을 뻔히 아는데도, 관객들은 숨죽이며 이태신 사령관을 응원하게 되는 이유다. 아마도 사건 이후 이태신 사령관의 실제 모델이었던 장태완 장군의 아픈 가족사가 영화적 상상력의 원천이 됐을 것이다.

주인공은 전두광이지만, 관객들의 뇌리에는 단연 이태신이 우뚝하다. 국방을 책임지는 장관조차 반란군의 편에 선 암울한 상황에서도 꿋꿋이 군인의 본분을 다하는 그의 존재는 우리 국군의 명예를 지켜낸 최후의 보루가 됐다. 관객들은 그의 정의로운 모습을 통해 위안을 얻는다.

"눈앞에서 내 조국이 반란군에게 무너지고 있는데, 끝까지 항전하는 군인 하나 없다면 그게 군대냐?"

이태신의 일갈이야말로 감독이 관객들에게 건네고 싶었던 메시지 아니었을까. 영화 속 대사일지언정 "실패하면 반역이지만, 성공하면 혁명"이라고 호기롭게 말하는 전두광에 맞서 "대화는 사람끼리 하는 것"이라고 일축하는 이태신의 모습은 가슴마저 벅차오르게 한다. 시종일관 그의 의연한 자세는 전두광의 비루한 권력욕을 더욱 누추하게 만든다.

반란군을 단죄하지 못한 역사
 

영화 <서울의 봄> 스틸 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자막이 올라간 뒤에도 묘한 기시감에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근현대사를 소재로 한 영화 중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는 <암살>을 관람한 뒤의 '불편함'과 겹쳐서다. 누가 뭐래도 <암살>의 최고 명장면은 염석진을 독립군이 응징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몽환적 분위기를 통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염석진은 대표적인 '친일 경찰' 노덕술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고등계 형사 출신인 노덕술은 해방 후 단죄되지 않았다. 처벌은커녕 이승만의 비호 아래 반민특위 해산에 앞장서며 승승장구했다. 말년에는 반공 투사를 자임하며 고향 울산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까지 했다. 낙선한 뒤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진 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자연사'는 친일 잔재 청산에 실패한 우리 현대사의 치욕으로 기억된다.

정작 생존해 있을 땐 단죄하지 못하고, 영화를 통해서 응징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펐다. 그것도 수십 년이나 지난 뒤라 비겁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1949년 반민특위가 해체된 후 친일 잔재 청산 문제가 다시 사회적 화두로 떠올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결성된 때가 2005년이니 애꿎은 영화만 탓할 일은 아니다.

노덕술이 그랬듯, 전두환도 '자연사'했다. 그것도 92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니 참 오래도 살았다. 이 영화가 그가 생존해 있을 때 상영됐다면 어땠을까. 영화 <26년>부터 <꽃잎> <박하사탕> <화려한 휴가> <택시운전사>에 이르기까지 그와 관련된 작품이 적지 않지만,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그의 '진면목'을 보여준 건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다.

"저런 때려죽일 놈들!"이라는 분노의 외침은 군사 반란을 일으키고 무고한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그를 단죄하는 일이 여전히 영화의 몫임을 증명한다. 놀랍게도, 이 작품이 12.12 군사 반란을 소재로 한 첫 번째 한국 영화라고 한다. 왜 이제야 나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긴 교과서에 '군사 반란'이라고 적시된 것도 그리 오래전 일은 아니다. 이전의 교육과정에서는 공식 명칭이 '12.12 사태'였고, 그마저 신군부가 집권한 계기였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서술됐다. 12.12 군사 반란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서울의 봄'과 5.18 민주화운동의 직접적 계기였다는 사실은 최근에 와서야 강조되는 내용이다.

하세월이 흐른 뒤 영화에서나 바루어지고 승리하는 역사는 가치관이 물구나무선 현실의 반영이다. 그나마 영화의 소재가 되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75년이나 지난 제주 4.3과 여순 사건은 유족마저 세상을 등진 이제야 진상규명 특별법이 제정됐으니 더 말해서 무엇 할까.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며 열패감만 안길 뿐이다.

하나회, 그리고 지금의 검찰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앞 깃발. 2021.3.3 ⓒ 연합뉴스

 
영화가 아닌, 현실과 포개지는 기시감도 있다. 전두광을 정점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하나회는 윤석열 대통령 휘하의 검찰 조직과 빼닮았다. 후배와의 우정을 등진 채 조직에 충성하는 반란군 장교의 모습에서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대통령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영화 속에서 반란군과 맞선 공수혁 특전사령관을 호위하던 오진호 비서실장을 쏜 건 그의 친구였다. 김오랑 중령을 실제 모델로 삼은 오진호는 카메오로 출연한 정해인이 연기했다.

전두광이 10.26 수사 중에 대통령 비서실에서 나온 현금 9억여 원 중 일부를 떼어내 정상호 육군참모총장에게 건네려는 장면에선 누구든 검찰의 특수활동비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또 전두광이 하나회의 후배인 설 소령의 등을 토닥이며 건넨 "자네가 나고, 내가 자네"라는 말에선 검사동일체의 원칙이라는 단어가 스친다.

민주주의의 퇴행을 우려하는 기자들 앞에서 "이 나라가 민주주의 아닌 적이 있었습니까"라고 반문하는 전두광의 뻔뻔한 모습은 정부 비판 기사를 '가짜뉴스'로 폄하하는 현 정부의 모습과 데칼코마니다. 전두광이 하나회 선후배들과의 술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라고 외치는 장면에서는 흔히 '아무개 사단'이라고 통칭하는 검찰 내 사조직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영화는 여기에서 멈추지만, 우리는 이후에 벌어진 참담한 역사를 잘 알고 있다. 신군부에 저항하는 광주시민을 무참히 학살한 뒤 대통령 자리에 오른 전두환은 국가 권력을 철저히 사유화했다. 그에 맞선 '참군인'들은 멸문지화를 당했고, 장관과 국회의원 등 고위공직은 물론, 수많은 공기업 사장 자리가 그를 추종했던 하나회 선후배들의 전리품으로 전락했다.

12.12 군사 반란 이후 안기부장 자리를 꿰찬 유학성, 감사원장에 오른 황영시, 교통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의 감투를 쓴 차규헌과 정호용, 육군참모총장이 된 박희도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특히 직속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배신한 박희도는 영화 속의 비중이 너무 작아 아쉬울 정도다.

전두환의 최측근으로 그를 평생 보좌한 장세동과 반란 계획을 주도해 권력의 2인자가 된 허화평, 정승화 당시 계엄사령관을 불법 연행한 허삼수 등의 이름도 잊어선 안 된다. 그들은 안기부장과 청와대 수석비서관으로서 군사독재정권의 주구가 되어 권력 농단에 앞장섰다. 전두환의 '친구' 노태우는 어부지리로 다음 대통령에 당선되어 민주화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감독이 의도한 바는 분명 아닐 테지만,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내쫓듯' 12.12 군사 반란을 다룬 영화가 '검찰 공화국'이 된 오늘의 현실을 관객들에게 환기시키고 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정적 제거'와 '제 식구 감싸기'에 활용하는 야만성은 1979년 겨울과 2023년 겨울이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영화 속 오국상 국방부 장관의 무능하고 무책임한 행태에서, 얼마 전 사퇴한 국방부 장관의 모습을 떠올리는 건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9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