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10 07:09최종 업데이트 23.08.10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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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를 전하는 뉴스는 많아도 행간을 읽는 칼럼은 드뭅니다. '좌우'라는 정형화된 정치 지형을 넘어, 여러 가지 이슈의 비틀어보기를 시전하겠습니다. [기자말]

2012년 8월 23일 자 <한겨레> 기사 ⓒ 한겨레


"나 혼자 죽기 억울했다"… 자포자기형 분노 범죄

조아무개에 관한 기사냐고? 아니다. 정확히 11년 전인 2012년 8월 23일, <한겨레>에 실린 기사다. '묻지마‧무차별 칼부림 왜?'라는 부제가 붙은 기사는 실직에 앙심을 품고 서울 여의도에서 칼부림을 벌인 30대 남성과 지하철 1호선 의정부역 전동차 안에서 승객들에게 흉기 난동을 벌인 또 다른 30대 남성 등 총 네 가지의 사례를 든다.


'무차별 살상' 뉴스가 연일 미디어에 오르내리고 있다. 지난달 21일 서울 신림역 인근에서 흉기난동으로 4명의 사상자를 낸 조아무개(33), 지난 3일 경기 성남시 서현역 인근에서 14명의 사상자를 낸 최아무개(22) 등의 뉴스다.

그러나 시대나 장소를 불문하고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 범죄는 있었다. 일본은 2008년 도쿄에서 17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아키하바라 살인 사건'으로 전 국민이 경악한 이후에도 무차별 살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 피의자를 두고 일본에서는 '길거리 악마'라는 뜻의 '도리마'(通り魔)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요즘처럼 범죄의 레퍼런스를, 실황 그대로 볼 수 있는 때는 없었다. '모방 범죄'는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이젠 아예 대놓고 온라인 상에 여과되지 않은 범죄 현장의 영상이 그대로 돈다. 구체적 실감으로서, 범죄가 존재하는 것이다. 

실제 신림동 살인사건과 서현역 사건은 비슷한 경위의 무차별 살상이 꼬리에 꼬리를 문 형태다. 신림동 살인사건의 피의자 조아무개는 범행 한 달 전 온라인에서 '홍콩 묻지마 살인'을 검색했다.

'홍콩 묻지마 살인'은 지난 6월 홍콩 쇼핑몰에서 일어난 흉기난동으로 20대 여성 두 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홍콩 당국이 사건 영상을 무분별하게 공유하지 말 것을 당부했지만, 해당 영상은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삽시간에 퍼졌다. 서현역 사건의 피의자 최아무개 또한 범행 전 휴대전화로 '신림동 살인'을 검색했음이 경찰 조사 결과 드러났다.

온라인에 우후죽순 올라오는 살인예고 글도 마찬가지다. 조아무개와 최아무개의 살상 이후 전국의 공항과 버스터미널, 야구장 등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다중 이용 시설에서 '살인을 하겠다'는 글이 연이어 올라왔다. 7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따르면 지난달 21일 신림동 살인 사건 이후 이날 오후 6시까지 온라인에 올라온 살인예고 글만 194건이다. 65명을 검거했는데 그 가운데 52.3%인 34명이 10대 청소년이다.

'밈'과 가짜뉴스의 콜라보
 

전국적으로 '살인 예고'가 속출하고 있는 7일 한 시민이 '살인 예고'를 정리해 알려주는 웹사이트에서 실시간 예고 글을 살펴보고 있다. ⓒ 연합뉴스


이들에게 '살인 예고'는 온라인 커뮤니티 혹은 SNS에서 즐기는 '밈'에 가까웠다. 그들 대부분은 경찰 조사에서 "장난이었다"고 고백했다. 오직 공포 조성을 통한 우월감을 점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게 목표인 하나의 유희였던 것이다. 194라는 숫자는 일종의 커뮤니티 문화에 가까워보이는, 죄의식을 무화할 수 있는 수치에 가깝다.

실제 경찰 조사에서 피의자들은 "장난으로 저지른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인천 계양역 살인예고 글을 게시한 10대 청소년), "게시글에 달릴 댓글이 궁금하고 관심 받고 싶어서 그랬다"(인천서 '여성 살해' 게시물을 올린 40대 남성)고 진술했다. 스포츠 팬 5만 명이 있는 오픈 톡에서 '사직야구장 흉기난동'을 예고한 고등학생은 "팀이 경기에 지고 있어서 홧김에 그랬다"고도 했다. 장난으로, 관심 받고 싶어서, 홧김에 이뤄진 '테러 예고'인 것이다.

이러한 온라인 상의 놀이 문화는 '디지털 도파민'을 증폭시켜 서로가 서로를 강하게 추동한다. 미국의 중독 전문가이자 임상 심리학자인 니컬러스 카다라스는 책 <손 안에 갇힌 사람들>에서 감각을 마비시키는 쾌락 호르몬인 '디지털 도파민'에 대해 논한다.

스마트폰 화면에 갇힌 사람들은 게임이나 SNS에 빠져드는데, 이들 디지털 플랫폼은 며칠 이상 반복적으로 사용 혹은 의존할 수 있는 도파민 보상 시스템을 활성화한다. 이로 인해 '극단까지 가면 일반적인 자극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분포를 벗어난 곡선의 끝에는 실제로 유령이나 다름없는 젊고, 공허하고, 화가 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인간성을 말살하고 감각을 마비시키는 디지털 실험실에서, 강력한 전염력을 바탕으로 죄의식도 없이 테러 예고글을 올리는 것이다.

누군가의 신변을 위협하는 '밈'이 유행처럼 번지는 것도 문제지만, 더욱 큰 문제는 이들 '밈'이 온‧오프라인 공간에서 효능감을 발휘하는 환경에 있다. 가짜뉴스가 무분별하게 재생산되는 온라인 공간, 미디어에서 특히 위세를 떨친다.

'경기 포천의 버스터미널에서 발생한 흉기난동으로 30명이 다쳤다', '대구의 PC방에서 손님이 직원을 흉기로 찌르고 도주했다'는 식의 괴담이 여러 갈래로 재생산되는 식이다. 이른바 '온커따'(온라인 커뮤니티에 따르면)로 시작되는 확인 없이 받아쓴 뉴스 기사들이 대중의 공포를 확산시키는 한편으로, '밈' 제작자의 영향력을 강화시킨다.

이러한 '밈'과 가짜뉴스의 콜라보 속에서, 일상에서는 긴장이 상시화된다. 퇴근길,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는 게 낙이라던 직장인은 혹시나 모를 위해에 눈 똑바로 뜨고 주변을 살펴야 한다. 사람이 많은 대형 쇼핑몰이나 내부가 어두운 영화관 등의 다중 이용 시설은 어느덧 재난 영화의 세트장 같은 위협감을 준다.

흉기 난동이 예고된 장소를 알려주는 웹사이트에 틈틈이 접속, 내가 있는 곳의 안전을 확인해야 한다. 전국 도심에 배치된 경찰특공대와 전술장갑차가, 이러한 긴장을 더욱 가속화시킨다. 그저 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피곤하다. '살인예고'가 유행인 시대의 일상이다.


손 안에 갇힌 사람들 - 화면 중독의 시대, 나를 지키는 심리적 면역력 되찾기

니컬러스 카다라스 (지은이), 정미진 (옮긴이), 흐름출판(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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