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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표지판" 꿈꾸는 영상 번역가의 모든 것

[인터뷰] 미드 '뉴스룸' 번역한 황석희 "좋은 영화사일수록 작가 생리 이해"

15.03.10 11:03최종업데이트16.04.04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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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희 작가가 참여한 영화 <폭스캐쳐>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범람하는 외화들 틈에서 제대로 된 한글자막이 없다면? 세계 유수 영화제 수상작, 아카데미 수상작들을 막상 만나도 그것들이 품고 있는 참뜻을 알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황석희 작가는 영상 번역을 두고 "문화적 표지판을 세우는 일"이라 정의했다. "A문화와 B문화 사이를 정확하면서도 재치 있게 안내하는 전달자"가 바로 황 작가가 생각하는 좋은 영상 번역가다.

영상 번역의 세계에 대해선 지난해 윤혜진 작가 인터뷰(관련 기사 : 외화 번역에 대한 오해, "내용만 전달하면 끝이라고요?")를 통해 소개한 바 있다. 황석희 작가를 통해서는 영상 번역가가 국내 영화 시스템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들이 작품을 만나고 우리에게 전달하게 되는지에 집중했다. 프리랜서라지만 철저히 을일 수밖에 없는 게 바로 이들이기 때문이다.

번역가 선택은 영화 수입사 마음..."서로가 동료이자 스승이자 경쟁자들"

황석희 번역 작가. ⓒ 이선필


황석희 작가가 번역한 작품 수십 편을 나열할 수 있지만 그를 상징하는 대표작을 꼽자면 단연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더 퍼시픽>이다. '발사'와 '발포'의 차이를 정확하게 구분해 쓰는 등 군대 용어를 생생하게 번역해 국내 '밀덕'(밀리터리 덕후)들의 절대 지지를 받았다. <뉴스룸> 역시 그가 맡아 국내 시청자들에게 소개된 사례다. 영화로는 좀비 영화 <웜바디스>(2013)를 꼽을 수 있다. 좀비 마니아들 사이에서 '약 빨고 자막 만들었다'는 평을 얻었고, 이후 여러 영화사의 러브콜을 받게 된 계기가 됐다.

사실 영화 번역가로 진입하는 장벽은 꽤 높은 편이다. 검증된 작가에게만 작품이 몰리는 현상 때문이다. 1세대 영상번역가로 꼽히는 이미도에 이어 여러 명의 작가들이 활동 중이나, 그래봐야 10여명 남짓이다. "그중에서도 꾸준하게 매년 작품 번역을 하는 사람들을 꼽자면 대략 7명 정도로 추릴 수 있다"고 황 작가는 전했다.

워너브라더스나 20세기폭스 같이 직접 영화를 국내에 배급하는 대형 배급사든, 중소수입사들이 영화를 들여오든 소수의 작가에게 일이 몰리는 셈. 황 작가는 "사실 번역가를 정하는 건 담당자 마음이다. 작가에 대한 평가가 좋으면 계속 연락을 취하는 일이 많다"며 "회사마다 선호하는 작가가 있는데 대부분 한 작가와 꾸준히 작업하는 편"이라 말했다.

"처음부터 극장 번역을 하는 사람은 더욱 소수예요. 저도 케이블 번역 경력이 5년 될 때까지도 극장과 인연이 없었죠. 홍주희 작가님 소개로 영화 <선샤인 클리닝>을 처음 맡게 됐고, 이후 <웜바디스>의 예고편을 보고 너무 하고 싶어서 제 포트폴리오를 수입사에 보내고 졸랐죠. 실무자가 <뉴스룸>을 번역한 걸 보고 절 회사 부사장에게 추천했다던데 정작 부사장님은 제가 원래부터 영화 번역하는 사람으로 알고 계약한 거더라고요. 그 뒤로 꾸준히 하게 됐어요."

막상 원하는 영화 번역을 하게 됐지만 황석희 작가는 "수입사에서 영화에 대한 여러 지출을 아낄 때 가장 먼저 손대는 쪽이 번역료"라면서 "프리랜서들이라 작가들끼리도 이런 문제에 대해 함께 태업할 여건도 안 된다. 서로의 번역을 보면서 자극받고 공부하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동료이자 스승이자 경쟁자일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첫 번째 그림자..."번역 작가? 가장 먼저 돈 떼이는 이들"

영화 <웜바디스>의 한 장면. ⓒ 데이지 엔터테인먼트


"일반 직장에서는 못 견뎠을 성격 탓에 이 길을 택한 것도 있다"며 "좋아서 하는 일"이라 황 작가는 말하지만 그렇다고 번역 작가들이 처한 시스템적 문제를 외면할 수는 없다. 말이 프리랜서지 매번 일을 따내야 하는 비정규직이다. 동시에 누구보다 치열한 현장 영화인이기도 하다.

황석희 작가는 일부 번역가들 사이에서도 케이블 번역가를 무시하는 분위기부터 지적했다. "러닝타임으로만 치면 시즌별로 스무 편 가까이 되는 케이블 드라마가 영화 한 편보다 훨씬 길다"며 황 작가는 "일의 양도 상당히 많고 실력 차이라고 해봐야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영화 번역도 물론 녹록치 않다. 황 작가는 "외국 말장난을 도저히 한국말로 고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며 "대 여섯 번 돌려 보면서 최대한 원뜻을 살리려고 하는 게 내 일인데, 번역이 불가하다고 포기해버리면 죄책감이 들 정도"라고 속내를 전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아무래도 번역 작가에 대한 일부 영화인들의 몰이해다. 처우 문제에 대해 황석희 작가는 "왕성하게 활동할 수만 있다면야 먹고 살기에 문제는 없다"면서도 "다만 제대로 대우받는 사람이 소수라는 게 걸린다"고 말했다. 그에 따라 번역료 체불 또한 꽤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지적했다.

"주위에 1000만 원 정도 못 받은 번역가가 있어요. 저 역시 지금 650만 원 정도 못 받고 있죠. 수입사 상황이 어렵다면 떼이기 십상입니다. 의리를 지킨다며 늦게라도 주면 감사하죠. 수년을 기다려도 무소식인 회사도 있어요. 케이블 번역에서는 떼이는 일이 비일비재해요. 판권을 가졌지만 영세한 회사가 많거든요. 시즌 몇 개를 끝내도 안 주는 경우가 있는데 단순히 돈만 못 받은 게 문제가 아닌 그 시간에 대한 기회비용도 날리는 셈이죠." 

두 번째 그림자...번역에 대한 '불통', "이게 최악"

보통 수입사 기준으로 케이블 드라마는 편 당(40~50분 분량) 하루에서 이틀, 영화는 편 당 일주일 정도의 작업 시간을 준다. 이 안에서 작가들은 나름의 개성과 철학을 담아 번역을 한다. 드라마가 보통 편 당 20에서 25만 원 정도, 영화는 편 당 150에서 400만원의 번역료를 받는 요즘 환경에서 이들 번역가가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려면 적어도 일주일에 5편의 드라마나 1편의 영화를 맡아야 하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이는 단순한 산술이다. 여기에 번역가들이 작품에 따라 말씨를 살리고 전문 용어를 풀어놓는 과정과 수입사나 직배사 간 확인 과정을 고려하면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진짜 문제는 작업의 물리적 양이 아닌 소통과 이해 부분에 있었다.

"보통은 작가와 고용자 간에 소통하면서 건설적으로 작업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종종 초벌 자막에 대한 어떤 답도 없이 난도질당하는 경우가 있어요. 이게 최악이죠. 내가 작업한 자막에 대해 무엇이 부족하고 보완해야하는지 등을 얘기해주면 되는데 아무 말 없이 있다가 개봉 때는 전혀 다른 자막을 내보내는 거죠.

그 다음으로는 작업해 드린 자막에 빨간 줄을 막 그어서 내놓는 경우가 황당하죠. 고용자가 이런 식으로 대사를 전하면 좋겠다고 의견을 주는 거면 당연히 받아들이죠. 가끔은 홍보사에서 빨간 줄을 쳐놓고 바꾸라고 하는 일도 있어요. 원하는 부분을 고쳐줬는데 그대로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있고요. 소수의 사람들이 그럽니다. 이렇게 치면 번역 작가는 갑과 을도 아닌 정이에요 정. 좋은 영화사일수록 작가 생리를 이해하고 일을 맡기죠."

최근까지 국내에 여러 번역아카데미가 생기면서 번역 작가 역시 선망의 직업군으로 떠오르고 있다. 황석희 작가는 "이 일을 꿈꾸는 사람은 많은데 현직으로 활동하려면 전국 7등 안에 들어야 하는 현실"이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만큼 좁아진 문에서 황 작가는 "운과 기회도 따라야 하기에 안쓰럽다"며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게 케이블 번역일인데 그쪽 산업이 너무 망가졌다. 새로운 방식으로 서로가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할 때"라고 말했다.

당당하고 화려해 보이지만 녹록치 않다. 번역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늘 "영어 실력보다는 한국어 실력을, 한국어 실력보다는 센스를 키우라"고 조언한다지만 그가 토로했듯 현장에서는 함께 시스템에 대해 고민할 시기로 보인다.

황석희 번역 웜바디스 폭스캐쳐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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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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