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땅에 쓰는 시> 스틸 이미지

영화 <땅에 쓰는 시>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이번 봄에도 선유도 공원을 찾았다. 높은 빌딩들로 가득한 서울, 답답함이 느껴지는 도심 속에 자연으로 그득한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반갑다. 해방구, 안식처라는 말을 떠오르게 한다. 휴우.. 숨이 좀 쉬어진다. 선유도는 계절마다 제각각 걷는 맛이 있지만, 그래도 역시 봄을 맞이한 선유도가 가장 아름답다. 벚꽃과 튤립이 만개해 말 그대로 빛이 난다. 

작은 숲속처럼 조성된 산책길은 물론이고, 수질 정화원, 수생식물원, 생태숲 등 눈길을 끄는 곳이 많다. 무엇보다 정수장 건축 구조물을 없애지 않고 활용한 조경이 흥미롭다. 수돗물 저장 덮개 기둥을 활용한 녹색 기둥은 선유도의 시그니처도 같다. 이 곳을 기획하고 만든 이는 누구일까. 이곳의 조경은 누구 작품일까. 선유도를 걷노라면 늘 머릿속에 머무는 물음표였다. 

궁금증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풀렸다. 한국 1호 국토개발기술사(조경)를 획득한 최초의 여성, 바로 정영선 선생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은 전시 '이땅에 숨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를 통해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의 조경 철학을 다룬다. 전시회는 2024년 4월 5일부터 9월 22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제7 전시실 및 야외 전시 마당에서 진행된다. 

정영선은 도대체 누구인가. 전시를 보며 깜짝 깜짝 놀랐다. 여기가? 여기도? '아시아 선수촌 아파트', '예술의 전당',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 '대전 엑스포', '광화문 광장 재정비', '경춘선 숲길', '여의도 샛강 생태 공원', '국립중앙박물관', '제주 오설록', '아모레퍼시픽 본사', '호암미술관 희원' 등 그의 손을 거친 건축물, 공원, 조경 사업이 셀 수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정영선은 산업화 시대를 지나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 조경 역사를 일군 산증인이다. 그렇다면 그의 조경은 무엇이 특별한 걸까. 정영선은 "조경사는 연결사"라고 말한다. 그의 조경은 사람과 경관의 관계를 고민하고, 건축과 도시, 나아가 대지의 관계를 해석하고 디자인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직업을 저토록 명료하고 직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니! 

"경북 경산 할아버지 과수원에서 태어나 사과 꽃 만발한 언덕에서 뛰어놀던 기억, 할아버지가 언제나 정결하게 가꾸시던 꽃밭 풍경을 가슴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다."

내친 김에 정영선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땅에 쓰 시>가 상영 중이라기에 씨네큐브 광화문으로 향했다. <범죄도시4>의 압도적인 흥행 질주의 여파는 스크린 독과점으로 이어져 작은 영화를 보려면 제법 발품을 팔아야 했다. 영화는 정영선이 살고 있는 양평 집 정원을 비춘다.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과연 1세대 조경사 정영선의 정원은 어떤 모습일까. 
 
 영화 <땅에 쓰는 시> 스틸 이미지

영화 <땅에 쓰는 시>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화려한 꽃들로 수놓아져 있을까. 아니면 희귀한 수목들이 심겨 있을까. 예상은 완벽히 빗나갔다. 정영선의 정원에는 도로변이나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들꽃과 들풀로 가득했다. 개미취, 오이풀꽃, 큰산꼬리풀, 개쑥무쟁이, 미나리아재비 같이 낯선 이름의 꽃들은 정영선의 조경이 지향하는 방향을 잘 보여준다. 그의 정원은 현장에 적용하기 전 식물을 직접 키워보는 실험실이기도 했다.

계절별로 다양한 자생종 꽃들이 피어나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는데, 고유 자생종의 생물 다양성을 보전하기 위한 정영선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인 대목은 정영선이 자연 속에서 조경 공간과 식물 디자인에 대한 아이디어를 찾는다는 점이다. 50여 년의 조경 인생 동안 우리 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던 그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박목월 시인에게도 인정을 받을 정도로 시인으로서 재능을 갖고 있던 정영선을 조경사의 길로 이끌었던 건 유년의 기억들이었다. 할아버지가 운영했던 과수원을 뛰어다니며 온갖 꽃들에 심취했던 시절은 그를 서울대 환경대학원 첫 졸업생이 되게 했다. 이후 국내에 조경이라는 분야가 정립되지도 않은 시기에 (주)조경설계 시안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조경 공사를 도맡았다. 

영화는 정영선이 조경사로서 겪었던 어려움도 담고 있다. 여의도 샛강을 주차장으로 만들겠다는 방침에 눈앞이 캄캄해진 그는 '샛강을 물고기도 살고 풀도 사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공사를 지휘했다. 당시 공무원들에게 김수영 시인의 '풀'을 읽어준 일화도 소개됐다. 우리나라 최초 생태 공원인 여의도 샛강 생태 공원은 정영선의 집념으로 완성된 셈이다. 

한편, 서울아산병원 조경에는 정영선의 철학이 잘 구현되어 있다. 그는 "몸이 아픈 환자는 병실 침대 대신 나무 그늘 아래서 울 수 있고, 억장이 무너지는 가족은 마음 편하게 숨어서 울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병원 앞에 나무가 빼곡한 녹지를 조성했다. 왕성한 생명력을 가진 나무들을 심고, 병원과 분리된 느낌을 주는 정원을 만든 것이다. 

"조경을 꽃이나 나무를 심고 예쁘게 다듬는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벗어나 (많은 이들이) 생태적, 인문학적 관점에서 우리 국토를 보는 눈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게 내 마지막 과제다."

이처럼 정영선의 조경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단계를 넘어서 삶과 밀착된 공간을 창조하는 의미로 확장되어 있다.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현장에서 직접 호미를 들고 꽃을 심는 정영선의 '마지막 과제'는 무엇일까. 그는 "어린 애들이 와서 메뚜기를 잡고 물을 만딜 수 있는 (땅을) 물려주는 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 어린 손주와 함께 호미질을 하며 꽃을 심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서린다. 

영화는 봄(풀또기, 돌단풍, 조팝나무, 이스라지, 병아리꽃나무, 하늘매발톱)에서 시작해서 여름(향나무, 잔대, 오이풀, 참억새, 꽃양귀비, 좀목형, 큰산꼬리풀, 부처꽃, 개미취), 가을, 겨울(목수국, 층꽃나무, 참억새, 황금국수나무)을 지나 다시 봄으로 순환한다. 자연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정영선의 정원은 계절의 변화를 극적으로 담아낸다. 또한, 거기에는 우리네 삶과 이야기가 있다. 

정원을 분주하게 거닐며 식물들과 살가운 인사를 나누는 정영선의 모습이 뇌리에 깊이 자리잡았다. "마음껏 자라봐라"고 말하며 유쾌한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도 마음 속에 각인됐다. 이제야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조경사를 '연결사'라고 소개한 정영선의 진심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종성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버락킴, 너의 길을 가라'(https://wanderingpoet.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땅에쓰는시 정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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