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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20일 저녁, 태풍의 영향으로 해일이 몰려오는 보길도 해변
ⓒ 강제윤
태풍은 아주 지나가 버린 것일까. 어제 그제 연 이틀 많은 비가 내리더니 오늘,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잔뜩 흐려 있습니다. 바람이 아니라 어제는 안개 때문에 배가 뜨지 못했습니다. 바다에서 바람보다 무서운 것이 안개입니다. 파도에도 길이 있고 바람에도 길이 있으나 안개에는 길이 없어 안개에 포위되면 천 마력의 배도 수만 톤의 배도 꼼짝없이 포박되고 맙니다.

여행을 다녀온 뒤 여러 날 집 주변의 풀들을 베느라 땀을 흘렸습니다. 이제부터 여름 내내 풀들과 전쟁입니다. 베어낸 풀들은 비파나무, 포도나무, 앵두나무, 매화나무, 밀감나무, 자두나무, 배나무, 감나무들 밑 둥에 깔아 주었습니다. 썩어 거름도 되고, 수분도 유지시켜 주겠지요.

묘목으로 사다 심은 수십 주의 과실나무들이 지난 6~7년 동안 그렇게 베어낸 풀들과 햇빛과 바람과 빗물만으로 자라나 마디가 굵어지고, 뿌리가 깊어져 이제는 조금씩 열매를 맺기 시작합니다.

지난 여행길에 욕지도에 다녀왔습니다. 언제나처럼 이번 여행도 사람을 찾아가는 여정이었습니다. 욕지도. 그가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을까. 배에 오르며 잠깐 의심했으나 이내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가 그곳을 떠나 갈 곳이 이 지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그는 이제 아주 거기에 정착한 것일까. 나처럼 그 또한 이제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아주 없어진 것일까.

몇 년 전 그가 손수 농사지은 고구마 한 자루를 보내 온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밭에 심어 거둔 고구마와 다르지 않은 달디단 물고구마. 그가 보내온 고구마를 쪄먹으며 왈칵 눈물 흘리기도 했지요. 그 모진 생애의 들판을 건너 그도 살아 남고, 나도 살아 남았음을, 삶은 고구마 하나가 일깨워 주었던 까닭이었을까요.

나는 섬에서 나와 또 섬으로 갔습니다. 경남 통영항에서 한 시간 40분, 뱃길의 끝자락에 욕지도가 있습니다. 그가 욕지도에 정착한 뒤 서너 차례 다녀온 기억이 있지만 이번 뱃길은 꽤 여러 해 만이어서 그런지 낯설기가 마치 처음인 듯싶었습니다.

▲ 2004년 6월, 남해 바다
ⓒ 강제윤
동행한 두 후배와 함께 욕지도 부두에 내려 옛 기억을 더듬어 걸었습니다. 산을 하나 넘으면 그가 사는 혼곡(混谷)이 있습니다. 남태평양 쪽으로 툭 트인 앞 바다가 늘 안개 때문에 혼미하여 이름 붙여진 골짜기 혼곡. 사람의 바다 어느 한 곳인들 혼곡이 아닌 땅이 있을까요.

그 깎아지른 낭떠러지 한 모퉁이 작은 골짜기, 거기 위태롭게 집 한 채가 터를 잡고 있습니다. 욕지도로 숨어든 지 10년, 그는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나의 대학 선배인 그는 80년대 초부터 오랜 기간 서울 성수동 공장지대에서 야학을 했습니다.

아파치 추장처럼 당당한 체구의 그가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나 역시 묶여있을 때였지요. 암벽 타기를 즐기고 틈만 나면 산에서 살던 그가 석유 버너 폭발로 3도의 중화상을 입고 이미 1년 넘게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나는 가보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그가 살아나지 못할 거라 여겼으나 그는 두터운 고통을 뚫고 마른 나무에 새순 돋듯 살아났습니다.

다시 그의 소식을 들은 것은 또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습니다. 그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남해안의 외딴 섬에 들어가 산다고 했습니다. 그가 입산했다는 소식도 들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머리를 깎지 못했고 대신 사랑하는 연인의 머리를 깎아 산문까지 동행했다지요. 연인은 비구니가 된 후 영영 소식이 없다 했습니다.

결국 그는 어느 스님과 욕지도까지 흘러갔고, 거기 빈집을 고쳐 토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스님과 그는 반농반선(半農半禪)했습니다. 낮에는 비탈 밭을 갈아 농사짓고, 밤에는 법당에 앉아 참선을 하고 그렇게 한 세월을 건너는 듯 했습니다. 스님은 한때 민중불교 운동의 전선에 있었고 이미 말기 암 환자였습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처음 욕지도엘 갔던 것이 10년 전이었지요. 그때 이미 스님은 없고 그만 혼자 남아 있었습니다. 내가 욕지도를 찾기 한달 전쯤에 스님은 열반에 들었다고 했습니다. 태풍이 오던 날, 그와 스님과 공중보건의와 연인, 그렇게 넷이서 파도 구경을 갔다지요. 그것은 동반 자살행이었을까요.

스님을 비롯해서 셋은 그대로 파도에 휩쓸려 가버렸고, 그 와중에서도 그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스님 일행의 마지막 모습이 그토록 평화로워 보였다고 그가 말했습니다. 스님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지요.

그 후 나는 욕지도를 몇 번 더 찾았고, 스님을 떠나 보낸 뒤에도 그는 여전히 농사짓고 참선하며 살았습니다. 삶에 짓눌린 많은 이들이 그곳을 찾아 노동하고 참선하며 다시 기력을 회복해 돌아갔습니다. 그곳을 다녀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 또한 보길도라는 섬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소식도 없이 욕지도를 다시 찾았습니다. 그 사이에 식구가 늘어 있었습니다. 아이 둘이 더 생겼고, 비구니였던 연인이 돌아와 그 아이들을 낳았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사는 것이 비구니 생활보다 세 배쯤은 더 힘들다며 유쾌하게 웃었지만 외로워 보였습니다. 세 배뿐이겠습니까. 그 고통이. 욕지도에 밤이 오고, 달이 떴다 저물고, 또 날이 밝았습니다. 나는 서둘러 욕지도를 떠났습니다.

잠시 생각이 욕지도에 다녀온 동안, 안개가 앞 개울까지 밀려와 있습니다. 오늘도 안개 때문에 또 한동안 배가 뜨지 못하겠지요. 누가 찾아올 것도 내가 떠날 것도 아닌데 배가 오고감에 왜 그리도 무심해지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섬의, 섬사람의 숙명이 이런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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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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