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04 12:11최종 업데이트 23.09.06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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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주판)의 마지막 세대이자 컴맹 제1세대, 부모에게 복종한 마지막 세대이자 아이에게 순종한 첫 세대, 부모를 부양했지만 부모로서 부양 못 받는 첫 세대, 뼈 빠지게 일하고 구조조정 된 세대인 베이비부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기자말]

한 구직자가 이력서를 작성하고 있다. ⓒ 연합뉴스

 
"우리 세대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마치 일사불란한 사회로부터 소박맞은 것 같은 기분이야. 애걸복걸 구걸하기는 싫지만 그래도 온전하게 받아줬으면 좋겠어."

나와 비슷한 연배의 김개똥(가명)씨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기업 영업팀 상무까지 지내다가 백수가 된 그는 나와 처지가 비슷했다. 장맛비와 땡볕이 왔다 갔다 하는 변덕스러운 날, 자그마한 카페에 그와 마주 앉았다. 그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입을 뗄 때마다 공명통 같은 소리를 냈다.


"인생은 덤으로 사는 거라고 하더니 진짜 '덤' 취급받는 것 같아. 사회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못하고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잉여인간. 주변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되지만 도움도 요구하지 않지."

잔뜩 풀 죽은 내가 말했다. 그는 동의한다는 투의 고갯짓을 한번 하더니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난 투명인간 같아. 오늘 하루가 무겁고 불편해. 지난날 피땀 흘렸던 세월은 자랑스러운 우리들의 훈장이 아니라, 그냥 저당 잡힌 인생의 한쪽에 불과했어. 하루 세끼 먹으면 만족하는 그런 개똥같은..."

등에는 짐이 한가득, 현실은 개똥 같은 우리들

그랬다. 우리는 개똥 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와 나 모두 1960년대생 베이비부머였다. 우리는 아이들을 키워냈고, 가정을 지켜냈으며, 행복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베이비붐(boom) 세대인 '우리들은' 어느 날 사회의 '폭탄(bomb)'이 돼 있었다. 내 스스로 그런 타이틀을 거머쥔 게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세월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베이비부머는 크게 한국전쟁 이후인 지난 1955~1974년 사이에 태어난 산업화의 주역이자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겪은 사람들이다. 세부적으로는 1차 베이비붐 세대(1955년~1963년생)와 2차 베이비붐 세대(1968~1974년생)으로 나뉜다.

청년이었을 땐 노동, 중년이 됐을 땐 부양, 노년이 됐을 땐 은퇴라는 변곡점을 관통하며 '시대의 중심부'에서 '시대의 변두리'로 밀려나 버렸다. 국가 경제 자유화, 정치·사회의 민주화를 이룬 선구자지만 집안 경제 자유화, 집안 살림 민주화는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늘 배고프고, 늘 절박하며, 불안하다. 사회적 '힘'이었는데 어느새 사회적 '짐'으로 둔갑했다.

이렇게 느끼는 베이비부머가 나뿐이 아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생활·화학특화 대기업에 다녔던 베이비부머 길성훈(가명)씨도 은퇴 후 그 격랑과 파장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중이다.

"내 경우엔 정년을 스스로 걷어찼습니다. 스스로 퇴직했으니까 할 말이 없죠. 은퇴를 당한 게 아니라 은퇴를 한 겁니다. 그런데 겁 없이 나와 보니까 일순간 갑갑해지더라고요. 아직 부모·자식을 챙겨야 하고, 대출 빚도 갚고, 최소한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돈이 필요한데 돈줄이 마른 겁니다. 은퇴 후 낙향해 유유자적의 삶을 보내겠다는 꿈을 꾸었어요. 그런데 퇴직 이후의 삶은 생각과 달랐습니다. 현실에 직면하니 '늙은 청년, 젊은 노인'의 나약한 일상이 돼버렸죠."

베이비부머들의 은퇴·퇴직은 '훈장'이 아니라 '낙인' 같은 것이다. 늙은 사람은 비효율적이라는 인식, 퇴직하면 경제적 능력이 없고 비생산적 인간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사회에서 멋대로 붙인 낙인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데, 베이비부머들의 등에는 여전히 감당하기 벅찬 짐들도 한가득이다. 부모와 성인 자녀 모두를 살펴야 하는 더블케어다. 부모를 직접 부양하거나, 병원·요양원에 모시는 동시에 손주까지 돌봐야 한다.

막노동 현장에서 같이 일했다가 함께 짐을 쌌던 이형제씨(가명)는 '캥거루족' 자식에 대한 걱정을 털어놨다.

"큰애가 아직도 취업준비생(취준생)이에요. 우리나라 자녀 4명 중 1명꼴로 취업을 못 하고 부모에게 의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취업에 성공했다고 해도 결혼시키고 결혼자금까지 도와주려면 아직도 까마득해요. 아들은 취준생, 아버지는 재취업. 한 집에 2명이 반백수 신세입니다."
 

지인 김개똥씨도 "아내가 손주를 보고 있는데 거의 식모(가사노동자)급이다. 아침, 저녁 어린이집 데려다주고, 밥 챙겨주고, 집안 살림까지. 어떨 때 보면 불쌍한 생각마저 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그때 그랬더라면'이란 후회가 자꾸만 남는다.

'그때 조금만 더 참고 일했더라면, 그때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은퇴 이후를 생각했더라면...'

이 가정법은 늘 한발 늦다. 그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결국 외치는 건 이 한마디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 좀 써주세요."

요즘 동네방네 다니면서 내뱉는 단골멘트다. 이 읍소는 한없이 처량하다. 1만 개가 넘는 직업 중 베이비부머의 선택지는 극히 제한적이다. 100세 시대, 평생직장이란 말이 공허한 이유다. 한곳에서 오래 버티기도 힘들고, 있는 힘껏 버틴다고 해도 60세 전후면 가방을 싸야 한다. 그렇다 보니 최소 2~3개의 직업군을 돌고 돌아야 그나마 연명이 가능하다.

베이비부머인 지인들은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다. 50~60대 은퇴자를 쿨하게 받아주는 곳은 많지 않다"며 "마음은 청춘인데 사회에선 이미 퇴물 취급을 한다. 쥐꼬리만 한 연금으로는 공과금 내기에도 빠듯하다"고 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한 한 마디는 '한 푼 줍쇼'의 비굴함처럼 혀가 말려들어 간다. 명치 끝에서 올라오는 절박함과 초조함이 뒤섞여 자동반사적으로 나온다. 배우가 아닌 이상 표정도 조정할 수가 없다. 그저 최대한 예의를 갖춘 늙은 가장의 호소력에 의존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불안·불만·불확실이라는 소위 '삼불(三不)'에 시달리고 있다. 불안하고 불확실하니까 불만을 참고 더 열심히 일한다.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대로, 나이 든 사람은 나이 든 사람대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는 MZ세대의 미래이고, MZ세대는 베이비붐 세대의 과거다. 앞서 베이비붐 세대가 걸어온 광야엔 고난과 역경의 상흔이 가득하다. 그래서 다시 외친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저 좀 봐주세요."
 

일자리 찾아 나선 노년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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