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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4월 1일, 대한민국 철도, 나아가 한반도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혁명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한국고속철도, KTX가 첫 번째 기적을 울리며 대한민국 전역을 일일 생활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올해로 20번째 생일을 맞이하며 성년이 된 KTX 이야기, 그리고 특별한 인터뷰까지 세 편으로 정리했습니다.[기자말]
14년째 KTX 안내방송을 담당하고 있는 고구인 성우가 서울 양재동에 위치한 자신의 학원에서 KTX 매거진을 읽어보고 있다.
 14년째 KTX 안내방송을 담당하고 있는 고구인 성우가 서울 양재동에 위치한 자신의 학원에서 KTX 매거진을 읽어보고 있다.
ⓒ 박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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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을 넘어 30년, 40년의 미래를 바라보며 매일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과 꿈을 싣고 떠나는 KTX. 하루 370여 편이 발착하는 KTX에서는 열차가 출발할 때마다, 그리고 그 열차가 정차역에 도착할 때마다, 마지막 역에 멈출 때마다 경쾌한 안내방송이 울려퍼지곤 한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라는 안내로 고속철도를 타고 내리는 수많은 승객들의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주인공, 고구인 성우이다. 그는 '첫 한국산 고속열차' KTX-산천이 운행을 시작했던 2010년부터 현재까지 차내 안내방송을 담당하고 있다.

2010년에는 경부선과 호남선만 있던 KTX도 이제는 강릉, 충주, 안동 등 전국 방방곡곡으로 향하게 됐으니, 'KTX의 성장사', 그리고 본인의 성우 인생 전부를 함께하고 있는 셈. KTX 개통 20주년을 기념하는 인터뷰로 고구인 성우를 최근 서울 양재동에 위치한 그가 운영하는 학원에서 만났다. 

"전국민이 모를 수 없는 배역... 영광이죠"

대원방송 2기 공채성우로 입사해 15년째 성우로 활동하고 있는 고구인 성우는 인기 만화인 <원피스>의 '프랑키', 아시안 게임에도 나왔던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인 '피들스틱'이나 '케인', '우르곳'의 목소리를 담당하는 등 만화영화·게임업계에선 이미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중에서도 '대표 배역'은 KTX 안내방송. 고구인 성우는 "사실 처음에는 영광이라는 생각만을 해왔다"면서도, "점점 해가 갈수록 의미가 더 큰 것이 KTX의 안내방송이다. 모든 국민이 모를 수가 없는 배역이 KTX의 안내방송이지 않냐"라면서 자랑스러워했다.

특이한 점은 성우 입봉과 동시에 KTX 안내방송의 녹음을 시작한 것. 그는 "성우 생활과 함께 시작한 것이 KTX 안내방송이었다"면서 그때를 돌아봤다.

"제가 다니던 녹음실이 성우가 되기 전부터 '인디 성우'로 일하면서 녹음하던 곳이었어요. 그러다 대원방송 합격하고 입사 직전에 동기들과 함께 술자리를 갖고 있는데 그곳에서 연락이 오더라고요. '무슨 일이세요?' 하니까 '뭔가 녹음할 일이 생겼다'고 하시는 거예요.

무슨 안내방송이냐고 물어보니까 KTX 열차 안내방송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정말 신기했어요. '이제 성우니까 페이 많이 주세요!'라면서 하게 됐는데, 돌아보면 천운이었어요. 공채 성우가 되면 겸직 문제가 걸리는데, 당시 회사가 애니메이션 더빙만 아니면 겸직이 가능하다고 해서 KTX 안내방송을 할 수 있게 됐죠."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KTX를 축하하는 슬로건이 2010년부터 운행을 시작한 KTX-산천 열차에 걸려 있다. 최근 중정비를 마친 열차인 덕분인지, 겉면에서 윤기가 난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KTX를 축하하는 슬로건이 2010년부터 운행을 시작한 KTX-산천 열차에 걸려 있다. 최근 중정비를 마친 열차인 덕분인지, 겉면에서 윤기가 난다.
ⓒ 박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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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녹음 때 엄청나게 떨었다는 고구인 성우. 보통 내레이션은 한 번 사용되고 마는 휘발성을 지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KTX 안내방송은 짧아도 몇 년 이상 처음 녹음한 목소리가 그대로 남는다. 그는 "그래서 목 컨디션을 많이 신경썼던 기억이 난다"며 첫 녹음을 회상했다. 다행히 녹음은 금방 끝났다고.

고구인 성우는 "녹음 뒤에는 '왜 나를 뽑았지?' 싶은 생각도 들더라. 개인적으로는 목소리가 좋다거나 특이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라면서, "<나는 자연인이다> 내레이션을 하는 정형석 선배님 같은 분들에 비해 목소리 면에서 부족하다고 생각했다"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런 생각이 깨지게 된 것은 동료 성우들, 그리고 KTX 이용객들의 긍정적인 반응 덕분이었다고 고구인 성우는 이야기했다.

"제가 KTX 성우라는 주제로 유튜브 프로그램에 나간 적이 있어요. 'KTX를 자주 타고 다녔었는데, 성우님 목소리를 들으니까 그립다'는 댓글이 달렸더라고요. '그분들의 추억을 내가 함께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한 성우들도 KTX만 탔다 하면 제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너 가식적이다' '형이 이런 목소리에요? 말도 안 돼' 같은 장난 섞인 반응을 보내줬어요. 정말 고마웠죠."

"12년 만에 처음 탄 KTX... 저도 사실 닭살 돋았어요"

KTX의 목소리가 된 지 10년이 넘도록 정작 KTX를 실제로 못 타봤었다는 고구인 성우. 보통 지방을 갈 일이 있을 때면 운전을 했기 때문이었다고. 그러다 2년 전에 지인 결혼식이 부산에서 열리면서 드디어 KTX를 타 봤다며 웃으며 말했다.

"사실 대중교통에 대한 기억이 운전대를 잡기 전, 그러니까 15년 전에 머물러 있었어요. 그런데 KTX를 타보니까 너무 조용하고 빠르더라고요. 좋고 쾌적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제 목소리요? 열차 스피커로 나와서 그런가, 정말 기계음처럼 나오더라고요. 제 스스로도 엄청 '닭살'이 돋았지 뭐에요. 목소리 톤이 일정해서 그랬나?"

녹음할 때는 몰랐던 걸 알게 되었다고 했다. KTX에서 내내 졸면서 갔는데도 자신의 목소리가 잘 들려서 잠 깨기에 좋았다는 점이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는 '열차에 뭘 두고 내리면 정말 답답하겠구나' 싶었다는 것. 고구인 성우는 "두고 내리는 물건이 없는지 살펴달라는 멘트의 중요성을 실감했다"며 웃었다.

고구인 성우는 KTX 덕분에 무엇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명함'도 가졌다고 말했다. "내 직업이 성우라고 하면 '뭐 하셨어요?'라는 질문을 필연적으로 듣게 된다. 나는 'KTX', 세 글자로 끝낼 수 있다"고 말한 그는 "특히 요즘 성우들은 선배들처럼 모든 사람들이 아는 배역을 맡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참 운이 좋은 성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KTX가 정차역에 다다를 때면, 마지막 역에 도착할 때면 어김없이 그의 목소리가 나오곤 한다.
 KTX가 정차역에 다다를 때면, 마지막 역에 도착할 때면 어김없이 그의 목소리가 나오곤 한다.
ⓒ 박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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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KTX 때문에 생긴 당혹스러운 일도 있었다. 고속열차 모양의 아동 완구에 들어가는 멘트를 녹음하기로 예정이 됐는데, 녹음이 불발된 것이다. 그러다 자신이 운영하는 학원에서 전시용으로 쓰기 위해 KTX 모양의 장난감을 샀는데, 버튼을 눌러보니 자신의 목소리가 들어가 있어 깜짝 놀랐다는 것.

고구인 성우는 "KTX 스피커에서 나오는 내 목소리를 녹음한 것이 아닐까 추정했다"며 "어린이 장난감이라 지금까지 큰 대응은 않고 있지만, 사실 좀 당황스럽긴 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긴 시간동안 KTX의 목소리로 자리잡았으니 이런 에피소드도 생겼을 터. 14년 동안 KTX의 목소리를 맡은 '롱 런'의 비결도 궁금했다. 고구인 성우는 "최대한 밝은 음색으로 녹음한 덕분"이라며 "여행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누군가에게 추억을 주는 목소리가 행복하고 좋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녹음한다. 실제로 KTX 녹음을 할 때 밝게 웃는 표정을 지으면서 녹음했다"고 전했다.

"TTS나 AI 보이스? 성우만이 가능한 영역 알아줬으면"

14년 동안 KTX의 목소리를 맡고 있지만, 고구인 성우에게도 고민과 아쉬움은 있었다. 바로 교통 안내방송에서 성우들의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고 성우의 14년 경력이 굉장히 길어 보이지만, 철도 안내방송에서는 더 오랜 경력의 성우도 많다. 당장 한국에서 '짱구 엄마' 강희선 성우가 서울 지하철 안내방송을 1996년부터 28년 동안 맡고 있다. 일본에서는 원로 아나운서 사카이 마사유키가 1982년부터 지금까지, 42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토호쿠 신칸센의 안내방송을 하고 있기도 하다. 

수도권 광역전철을 비롯해 시내버스, 지하철 등에서 음성 합성 시스템, 이른바 'TTS'가 안내방송을 하는 것은 흔할 일이 됐다. "나도, 선배들처럼 KTX 안내방송을 오랫동안 할 수 있다면 정말로 영광일 것 같다"고 한 고구인 성우도 TTS, AI 보이스에 대한 물음에 착잡한 듯 말문을 뗐다. 

"사실 TTS로 너무 많이 넘어갔죠. 강희선 선배님 인터뷰를 최근에 접했어요. 보면서 안타까웠죠. '굳이 기계음으로 바꿔야 했을까' 싶더라고요. 물론 지하철도 계속 개통이 될 것이고, TTS나 AI 보이스로 바꿔놓으면 섭외나 제작이 간소화되는 것은 맞지만, 그런 게 우리가 대중교통에서 느끼는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요.

그래도 사람이 하는 것과, AI 보이스나 TTS가 말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어요. 아무리 두 가지가 발전한다고 해도 아래에 묻어나는 이질감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정 표출에 있어서 세심한 접근이 필요한 안내방송에서 TTS나 AI가 쓰이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큽니다."


그러며 고구인 성우는 "예전에 디지털 교과서 녹음을 했었는데, 거기서 출판사 분들이 클라이언트 분께 '이건 TTS로 해도 되지 않겠냐'는 말을 했다더라"며 "그 이야기를 듣고 '삽화를 보고 그 분위기에 맞춰 글을 읽는 것은 성우에게만 가능한 일일텐데...' 싶었다"고 전했다.

"KTX 타는 동안, 행복 안고 타셨으면"
 
2010년부터 현재까지 KTX 안내방송을 담당하고 있는 고구인 성우.
 2010년부터 현재까지 KTX 안내방송을 담당하고 있는 고구인 성우.
ⓒ 고구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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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주년을 맞은 KTX에서 하면 좋은 이벤트 같은 걸 생각한 적이 있냐는 질문에 고 성우는 '생각해둔 것이 있다'며 차내 깜짝 라디오 방송을 제안했다.

"KTX를 타는 분들을 위해 프로모션 하나를 했으면 해요. 안내방송을 하던 목소리가 KTX 차내 라디오처럼 변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승객들의 기운을 복돋워준다던지, 추첨을 통해 사연을 읽어준다던지 하면, 열차 안이 그 날은 참 즐거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끝으로 고구인 성우는 "내가 KTX 안내방송을 한 성우라는 것을 알리는 글이나 유튜브 영상을 보면, 댓글 달린 것 중에 고맙다는 말이 있다"며 "그 말을 들었을 때 나에게 감사를 보내신다는 것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런 말씀을 해주신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께 모두 답장을 다 달아드렸던 기억이 있다"고 고마움을 드러냈다.

이어 "이렇게 KTX를 통해 얼굴도 모르는 많은 분께 감사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가 성우로 살면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다"라는 고구인 성우. 마지막 인사는 오늘도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목적지로 향할 KTX 이용객들에게 건넸다. 

"요즈음 참 빡빡한 시기입니다. 어렵다거나 힘든 생각 하시기보다는, 행복한 모습을 떠올리면서 KTX 위에 오르셨으면 좋겠어요. 특히 KTX를 타시는 분들은 항상 먼 길을 오가시는 것이잖아요. KTX 안에서 바깥의 풍경 보면서, 옆의 친구와 가족을 보면서 행복을 안고 제 안내에 따라 목적지로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태그:#고구인, #성우, #KTX, #안내방송, #한국고속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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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기사를 쓰는 '자칭 교통 칼럼니스트', 그러면서 컬링 같은 종목의 스포츠 기사도 쓰고,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도 쓰는 사람. 그리고 '라디오 고정 게스트'로 나서고 싶은 시민기자. - 부동산 개발을 위해 글 쓰는 사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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