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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오전 경기도 용인시 에버랜드에서 시민들이 중국으로 떠나는 자이언트 판다 ‘푸바오’를 싣고 있는 무진동 특수 차량을 보며 배웅하고 있다. ‘푸바오’는 2020년 7월 20일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에서 태어났다.
 지난 3일 오전 경기도 용인시 에버랜드에서 시민들이 중국으로 떠나는 자이언트 판다 ‘푸바오’를 싣고 있는 무진동 특수 차량을 보며 배웅하고 있다. ‘푸바오’는 2020년 7월 20일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에서 태어났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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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3일 에버랜드 동물원에서 사육되던 자이언트 판다 '푸바오'가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이름이 가진 '행복을 주는 보물'이라는 뜻처럼 머물다가 중국으로 떠났다. 비가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인파가 에버랜드 동물원에 모였다. 중국으로 떠나는 판다 푸바오를 향해 인사하기 위함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이가 많았다.

푸바오를 향한 관심과 애정을 통해 사람들이 판다를 참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국내에서만 판다를 향한 인기가 유별난 것이 아니다. 미국 문화인류학자 마고 드멜로(Margo Demello)의 책 <동물은 인간에게 무엇인가>에서도 동물원에서 가장 특별한 동물은 판다라고 언급한다. 아마도 판다의 독특한 외모가 인기의 비결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푸바오의 인기는 푸바오의 성격과 행동 그리고 사육사들과 케미가 한몫했다.

중국으로 반환된 이유는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식물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CITES)' 때문이다. CITES에 의해 판다는 애초에 거래는 불가하고 임시 대여로만 데려올 수 있다. 2020년 7월에 한국에서 출생한 푸바오는 생애주기 상 번식 시기에 이른 4세 이전에 반환되었다. 푸바오의 엄마 아이바오와 아빠 러바오도 2031년에 반환될 예정이다.

몇몇의 시민은 '상상대로 서울'에 푸바오를 서울시 예산으로 데려오자는 민원 글도 게시했다. 서울시 예산으로 서울대공원에 동물을 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물권 관점에서 바라본 푸바오와 동물원

동물권 관점에서 푸바오 팬덤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과연 비인간동물을 향한 관심과 애정이 늘어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 

푸바오 팬덤 현상은 도시 내 만들어진 '동물원'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도시화된 지역에서 살다 보면 접촉할 수 있는 비인간동물의 종은 굉장히 제한적이다. 반려동물로 키우는 개와 고양이를 비롯한 작은 동물과 새 정도가 다일 것이다. 판다처럼 체구가 큰 포유류는 동물원에 가야만 볼 수 있다.

푸바오가 중국에 돌아간 이후 앞구르기를 지속한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판다는 원래 구르기를 놀이처럼 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다. 푸바오는 에버랜드에 있을 때에도 구르기를 자주 하곤 했다. 사람들은 '푸질머리'라고 애칭을 지어주며 푸바오의 앞구르기를 사랑스럽게 감상했다. 중국에서 반복하는 구르기는 달라보였나보다. 이상행동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푸바오의 구르기 행동이 이상행동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동물원에서 수많은 동물들이 정형행동을 보인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주코시스(zoochosis)는 지루함, 스트레스, 감금 상태에서 나타는 정신 이상 증세이다. 이로 인해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특정 행동을 하는데 이를 정형행동이라고 부른다.

동물권단체 케어에서 제작한 <침팬지 프로젝트>에서도 서울대공원 내 침팬지가 제자리를 빙빙 돌거나 흥분된 채로 동물원 쇠창살을 잡고 마구 흔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비단 전시동물의 문제만이 아니다. 정형행동은갇힌 동물들에게서 흔히 관찰된다. 필자가 비질(vigil, 도살장 등에 찾아가 폭력의 증인이 되고 기록하고 공유하는 행위)할 때에도 도살장에 들어가기 직전 트럭에 갇힌 돼지들이 코로 철창을 들어다 놨다 반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환경풍부화란 활동성을 높일 수 있는 구조물을 설치해주거나 노력을 기울여 먹이를 찾도록 만들어주는 '먹이풍부화', 냄새나 촉각 자극 등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감각풍부화'와 같은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을 뜻한다. 많은 동물원들이 환경풍부화를 통해 전시동물의 동물복지를 향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푸바오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육사들의 헌신적인 노력만큼은 감히 폄하할 수 없다. 필자도 푸바오를 향한 사육사들의 진심을 보면서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육사의 노력과 진심과는 별개로, 판다가 진정 있어야 할 공간이 동물원인지는 깊이 헤아려보아야 한다. 푸바오의 귀여움에 눈이 멀어 흐린 눈으로 동물원을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안전하게 동물을 감상하고 싶은 욕망이 낳은 공간 '동물원'

동물원은 '교육'과 '보전'이라는 명분으로 존재한다. 첫째, 동물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점과 동물을 연구할 수 있나는 점에서 교육 효과를 주장한다. 둘째, 서식지가 파괴되거나 과도한 사냥 등으로 멸종 직전에 있는 동물 종을 보전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동물원은 보전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동물원은 누군가에게는 완벽하게 안전한 공간에서 동물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완벽하게 통제된 공간이다. 동물을 감금하며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교육을 하고 있는 걸까. 동물원은 다른 종의 동물을 안전하게 감상하고 싶은 인간이 낳은 욕망의 공간이다.

푸바오는 '인기 상품'이었다. 푸바오를 상품이라 칭한 건 과장이 전혀 아니다. 임대, 계약, 반환 등 양국의 행위로 미루어볼 때 푸바오는 동물보다 상품에 가깝기 때문이다. 에버랜드는 판다를 데려옴으로써 방문객 수가 크게 증가했고 이에 따라 자연스레 수익도 늘어났다. 아이바오와 러바오의 임대 비용으로만 매년 10억이 넘게 지불하지만 놀랍게도 수익은 이를 넘어선다고 한다. 가히 밑 지는 장사는 아니다. 단순히 종 보존을 위해 양국이 판다 임대 계약을 한 건 아니라는 의미다. 

야생동물 보전을 위해 동물원 존립을 찬성하는 이에게 보전의 목적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동물권 관점에서는 마고 드멜로가 말한 것처럼 동물원의 '보전'으로서 존재 목적을 주장하는 논리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갇힌 상태에서 고작 2~3년쯤 살게 될 동물을 획득하기 위해 야생을 파괴했던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동물원들이 수천 종의 동물을 보전하는 책임을 지는 사회 조직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믿기가 어렵다."
- <동물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149p

도심에서 멧돼지라도 나타나면 당장 총을 쏴서 사살한다. 인간의 관리 부실로 동물원을 탈출한 퓨마도 사살했다. 이뿐인가. 사진작가 문선희의 사진집 <이름보다 오래된>에는 10년간 찍은 고라니 얼굴 50여 점과 작업 여정의 기록이 담겨 있다. 고라니는 해외에서는 멸종위기 종으로 지정되었지만 국내에서는 유해동물로 지정된 천덕꾸러기다.

유해동물로 지정된 고라니나 멧돼지를 포획하면 지자체에서 포상금을 준다. 한 예로 홍성군은 멧돼지는 10만 원, 고라니는 3만 원을 준다. 판다라는 특정 종을 보전하고 연구한다는 이유로 매년 10억 원을 지불한다. 이 두가지 일은 다른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니다. 오늘날 야생과 동물원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현실이다. 한 주머니로는 종 보존을 위해 10억을 지불하고 한 주머니에서는 유해동물 사살을 위해 돈을 지불한다. '종 보존', 어불성설 아닌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또 다른 푸바오'의 해방

동물원의 역사는 깊이 들여다볼수록 고통으로 얼룩졌다. 초기 동물원은 가장 멋지고 이국적인 동물을 전시하기 위해 경쟁했다.

현대 동물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 오키나와 츄라우미 수족관은 거대한 고래상어를 볼 수 있는 장소로 유명하다. 카메라 렌즈에 고래상어와 본인의 모습을 담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이 방문한다. 인기 상품은 사람을 불러모은다. 오키나와의 고래상어, 에버랜드의 푸바오는 인기 상품이었다. 동물원은 이국적이고 귀여운 푸바오를 전시했고 우리는 감상했다.

때론 이별이 우리를 성숙하게 한다. 푸바오에게 듬뿍 보냈던 사랑이 왜곡된 사랑이 아니었는지 되돌아보자. 여전히 동물원에는 푸바오 외에도 많은 동물이 존재한다. 구르기를 반복하는 푸바오가 고통스럽게 보인다면, 우리는 푸바오 외에 수많은 '갇힌 동물'의 고통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동물원은 감옥이다. 인간동물은 죄없는 비인간동물에게 무기징역이란 형벌을 내렸다. 동물원이 존재하는 한 갇힌 동물들의 들리지 않는 고통 소리는 마치 푸바오의 구르기처럼 반복될 것이다. 지금 이순간 우리가 해야 할 옳은 일은 무엇인가. 푸바오를 한국으로 다시 되돌리는 일일까, 아니면 동물원에 갇힌 동물을 해방하는 일일까.

* 참고자료
<동물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마고 드멜로
<이름보다 오래된>, 문선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 계정(@rulerstic)에도 실립니다.


태그:#푸바오, #동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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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에게 덜 폐 끼치는 동물이 되고자 합니다. 그 마음으로 세상을 읽고 보고 느낀 것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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