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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규명 결정 소식을 듣고
 진실규명 결정 소식을 듣고
ⓒ 김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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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화위)는 '재일교포김병진 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조사 결과 보안사가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지명수배된 김씨를 회유하고 장기간 가족 등을 탐문하는 사찰을 벌였고, 외무부도 김씨의 공소시효가 1995년 만료됐음에도 여권 발급을 2000년까지 금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병진 선생은 1955년 일본에서 재일교포의 아들로 태어났다(관련기사 : 매질·고문... 조국서 '간첩' 몰린 한 재일동포의 사연 https://omn.kr/1r67h). 1983년 7월 재일교포모국유학생이자 연세대 대학원생이었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보안사(현 방첩사) 서빙고분실에 불법 연행돼 장기구금과 고문 그리고 가족들에 대한 협박 등을 받는다. 수사관들은 하지도 있지도 않은 사실들을 조서에 써내려가면서 그를 간첩으로 만들었다.

사실과 다르다는 그의 항의에 대해 수사관들은 '서류상 이렇게 해놔야 다른 기관에서 너를 건드리지 않으니 안전하다, 오히려 너를 위하는 일이다'라는 궤변까지 늘어놓으며 김병진을 간첩으로 조작했다.

허나 수사관들의 요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보안사 간부들은 한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하고 또 일본에서 명문 고등학교를 나온 그를 이용하기로 했다. 저항을 했지만, 결국 그는 공소보류 기간인 2년간 강제로 보안사 대공처 수사과 군무원으로 강제근무(1986년 2월까지)를 해야 했다.

그는 학업도 포기해야 했고,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리고 25개월간 참고 견디며 보안사가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목도했다. 재일교포 피의자들의 통역으로도 동원됐기 때문에, 피의자라고 불린 많은 피해자들이 보안사 수사관들에게 무지막지하게 고문당하는 장면도 가까이에서 봤다. 김병진은 언젠가는 그들의 만행을 고발하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었고 2년간 그 결심은 더욱 굳어져갔다. 

가까스로 일본으로 탈출하다
 
연대 재학시절
 연대 재학시절
ⓒ 김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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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아들, 뱃속 딸을 데리고 가까스로 일본으로 탈출한 그는 도착한 즉시 <보안사>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대학원에 복귀해야 하니 가까운 시일에 한국에 돌아오겠다'는 등의 거짓말을 통해 보안사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한 달 넘도록 그가 소식을 전하지 않자, 보안사는 일본에 있는 그의 부친 집으로 연락을 해왔고, 결국 그는 만삭 아내와 세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피신해야 했다. 

이후 보안사는 한국 내 처가 형제들에게 연락을 해왔고, 결국 그는 처가쪽 피해를 우려해 자신의 연락처를 알려줘도 좋다고 했다. 이후 보안사에서 자주 전화가 걸려 왔고, 이로인해 아내는 신경증을 보였다. 또 돌아오라는 보안사의 편지가 집으로 오기도 해 수시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김병진 부부가 살고 있는 일본의 월세집에도 검은 양복차림의 사내들 네다섯 명이 카메라를 들고 와 집을 마구 촬영하는 일도 있었다.

김병진은 이대로는 안 되겠단 생각에 완성 전인 <보안사> 원고 일부를 일본 아사히신문사의 주간지 '아사히저널' 공모에 보냈고, 우수작에 선정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보안사> 원고만이 발표되지 않았다. 다행히 수상사실은 아사히신문지상에 발표됐고 이것을 계기로 아사히신문 편집위원이 출판사를 연결시켜주어서 일본어판 책 <보안사>가 출판됐다. 

이후 한국의 소나무출판사가 한국어로 출판하게 되었는데, 007작전을 방불케 했다. 보안사는 국내 전국서점에서 영장 없이 8000부 가량의 책을 압수했다. 출판사 직원들은 연행되고 사장인 유재현씨는 지명수배 되었다. 일본에 있던 그에게 보안사는 군사기밀법 위반 혐의로 출석 요구서를 보내며 공갈했다.

1988년 국방위 감사에서 야당 의원이었던 고 노무현 대통령이 보안사의 민간인에 대한 가혹행위와 김병진 저서 <보안사>의 진위여부를 추궁했다. <보안사>를 통한 김병진의 고발은 당시 그러한 금기를 깨뜨리고 국회 내에서 처음으로 보안사의 인권침해 문제를 공론화했다는데 의미가 크다. 보안사는 그 후로 재일교포 간첩조작을 못하게 되었고 또한 보안사가 민간인 수사를 금지당하여 간첩조작도 위축됐다.

그러나 김병진에겐 군사기밀법위반으로 기소중지와 지명수배 그리고 여권발급 금지라는 처분이 내려졌다. 당시 그의 국회 증인 출석이 고 박형규 목사(1923-2016)와 연락하면서 준비돼 있었다. 김병진을 군사기밀법위반 혐의로 조사하겠다고 출석을 요구하면서도 그의 여권을 무기한 발급금지한 보안사의 모순된 이 조처는 곧 귀국하지 말고 일본에만 있으라는 보안사의 고육지책이었다.

15년 만의 귀국
 
보안사 근무 당시 김병진 가족
 보안사 근무 당시 김병진 가족
ⓒ 김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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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월, 김병진이 사는 동네 주민들이 서명을 모아 김대중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 김병진 부부는 숨어 사는 동안 일본 한 지역의 생활협동조합에서 '한글강좌' 강사를 했는데, 탄원서 서명엔 한글강좌를 중심으로 지역 시민들이 동참했다. 그것이 결국 힘이 되어, 김병진은 햇수로 15년 만에 모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다음은 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 그리고 그 의미와 관련하여 피해자 김병진씨 선생과 지난 18일부터 21일까지 서면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어떤 부분에 대해 진실 규명을 신청했고, 2기 진화위에서 진실규명을 결정한 부분이 어떤 것인지 설명해달라. 

"2009년 1기 진화위에서 이 사건에 대해 진상규명 결정을 받은 바 있다. 나에 대한 불법수사와 2년간의 강제근무 등을 인정하고 국가는 사과하라는 내용이었다. 1차 진화위 조사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또 이명박 정권 시기라서 활동 마감이 임박해서 그랬는지, 보안사 탈출 후에 관해서는 훗날을 기약하더라도 일단 진실규명으로 매듭을 짓자는 분위기였다. 당시 나에겐 반쪽자리 진상규명이었다. 2기 진화위가 출범하면서 2021년 10월 조사개시 결정이 났는데, 주로 보안사 탈출 후의 출판탄압과 일본에서 고립되어 살아야 했던 이유인 군사기밀법 위반, 기소중지, 지명수배, 여권발급금지, 내 가족과 친인척들에 대한 협박 등을 규명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 진실규명 결정을 받고 어떤 감회가 들었나. <보안사> 책의 언론출판 탄압 등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있을 것 같은데. 

"나로서는 진상규명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진화위 김광동 위원장과 몇몇 보수계 위원들의 발언이 나와 고성이 오갔다고 들었다. 지난 1월 진화위에 상정됐다 보류 처리되었고 3개월 후에 겨우 진실규명이 결정되었다. 채택된 결정문 중 출판탄압에 대한 부분과 군사기밀법 적용 부분에 대한 판단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의신청의 여지는 남았지만, 이미 역사적 판단은 내려졌으니 진화위에 더 이상 뭘 바라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의신청 여부는 좀 더 숙고하겠다."

- 가족과 일본으로 돌아간 후 어떤 세월을 살았나?

"일본에서의 생활은 항상 신변의 안전, 가족의 안전 특히 어린 자식들에게 보안사가 해코지나 하지 않을까 불안한 생활이었다. 숨어사는 처지라 가정을 지키느라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고 어렵게 살았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지역 시민들과 '한글강좌'로 만나게 되었고 그들은 나의 여권발급 금지 해제를 위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괴로운 세월이었지만 시민 속에서 느끼는 보람도 많았다.

2024년 현재까지, 보안사가 기무사가 되고 또 방첩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옛날과 다르다고 지금까지 나에게 사과 한마디 없었다. 국가와 현 방첩사, 국정원, 또 경찰이 정식으로 사과하지 않은 한 그 아픔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 보안사의 인권침해를 고발하는 <보안사>를 일본어로 출판했고 그 후 한국어 번역판도 냈다. 책을 쓰게 된 동기와 어려웠던 점은. 

"아내와 함께 자살도 생각하였으나, 갓 태어난 아들의 고이 잠드는 얼굴을 보니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고민 끝에 찾은 삶의 이유가 '살아서 산 증인이 되겠다'는 결심이었다. 힘들었던 것은 눈물이었다. 원고를 쓰다가 읽고 또 읽으면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 눈물이 나서 마음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사실 출판 이후 책을 펴보지 않았다. 훗날 책을 읽은 사람이 책 내용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들으면서 내가 그런 문장을 썼구나 하는 감회를 느낄 정도였다.

당시 네 식구가 한 칸 방에 살았기에 탁자에서 원고를 쓰면 출입문을 등지게 되는데, 갑자기 누군가 문을 열고 쳐들어오는 망상도 했다. 또 생계를 위하여 학원강사 일을 구했는데 야간에 중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밤길에 누가 덮칠 것만 같아서 작은 등산 나이프를 지니고 다녔었다."

"보안사 요원들, 책임 져야 한단 생각으로 실명 표기"
 
김병진의 저서 <보안사>
 김병진의 저서 <보안사>
ⓒ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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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안사> 책의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면. 

"책에는 내가 백주대낮에 보안사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서빙고분실에서 고문과 협박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되는 과정, 직원으로 근무할 것을 강요받으면서 통역으로서 재일교포 피의자들의 심문과정, 수많은 고문과 폭력을 가감 없이 묘사돼 있다. 보안사 요원들은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실명으로 표기했고 덕분의 훗날 피해자는 가해자들을 특정할 수 있었다. 많은 피해자들의 재심재판 등에 내 책 <보안사>가 증거로 법원에 제출되어 재판에 큰 도움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간첩조작 피해자들은 자신을 조사하는 이가 어디 소속이며 그곳이 어딘지도 모른 채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보안사는 제일 많이 재일교포 간첩을 만들었는데 자신이 조사 받은 데가 보안사라는 곳이었다는 것을 아는 재일교포는 없었다. 안기부(현 국정원) 명의로 검찰에 송치되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 당시 책 <보안사>가 일본사회에 일으킨 반향은?

"당시 출판사로 편지나 독후감을 보내오는 등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독자들 중 한국에서 보안사로부터 박해나 고통을 받다가 현재 일본에 사는 사람으로 짐작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외로 열성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일본인 기독교 목사나 활동가들이 한국에 그 책을 반입하려다 공항에서 제지당하고, 한때 구속되기도 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곤 했다. 아무래도 출판 당시에는 그 반향이 예상치도 못하는 곳에서 일어났으며 그 후 한국에서의 출판 탄압으로 이어져 이곳 일본에서도 여러 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 1988년 당시 노태우 정권은 국내 서점에서 번역 판매 중인 <보안사>를 압수하는 한편, 보안사의 내부 사정을 누설함으로써 군사기밀보호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선생님에 대해 지명 수배와 여권 발급 금지 조치를 내렸다. 당시 그 억울함과 답답함을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일본에 피신한 지 수년 지났을 때 여권 기한이 지난 것을 알고 가족 전체의 여권을 갱신하려 오사카 한국 총영사관에서 수속을 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갱신을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안 되는 셈치고 수속을 했는데 이외로 여권은 발급되어 안도했었다. 그런데 며칠 후 총영사관에서 연락이 와서 '이쪽의 실수로 여권을 잘못 발급했다. 돌려주셔야 한다'고 했다. 총영사관을 찾아갔더니 젊은 행정관이라는 사람이 여권발급 금지자 명단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본국으로부터의 지시니까'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금지자 명단을 살펴보니 많은 금지자들의 인적사항과 해제기한이라는 난이 있고 다 언제 언제까지 발급금지 한다는 기재가 있는데 오직 나만이 해제기한의 난이 비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 발급금지가 되느냐고 물었더니 '주로 경제사범들'이라는 말이었다. 가족들은 여권발급이 됐고 나만 여권이 없는 현실이 아내에게는 더 괴로웠던 일이었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 문민정부라는 기대감에 몇 차례씩 청와대 앞으로 탄원서를 써보기도 했다. 답신이 왔는데 '법무부에 이첩했다', '국방부로 이첩했다'고만 했다. 전두환, 노태우 시대 못지않게 김영삼 정부도 나에게 가혹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생협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당시는 아직 한류 붐이 시작되기도 전이었다. 1996년, '한글강좌'를 개강한다는 소식에 모인 지역주민들의 수가 자그마치 70명을 넘었다. 그곳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게 되면서 닫혀있던 마음이 열리게 된 듯하다. 당시의 억울함과 답답함은 극복될 수야 없었지만 다른 희망은 찾게 된 듯하다. 아내의 '한글강좌가 없었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실감 있게 와 닿는다."

- 1988년 당시 보안사가 선생님과 그 가족들의 동향에 대해 장기간 탐문하고, 선생님에 대해 귀국을 종용하며 회유했던 것이 이번 진화위 조사에서 드러났다. 그 때 일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 

"국내 언론에서 나와 관련된 기사나 보도가 나갈 때마다 주로 국내에 있는 처가 형제들에게 내 동향을 묻는답시고 은근히 협박전화를 걸기도 했다. 내가 귀국을 희망한다는 신문기사가 나갔을 때 '들어오면 조사해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니 꼭 신고하라'고 보안사 박과장이라고 신분을 밝히면서 협박했다. 만약 귀국하면 공항분실에서 즉시 알려주니 처가 형제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을 텐데 말이다."

- 당시 외무부가 1988년 <보안사> 출판 이후 1995년부터 5년간 선생님의 공소시효가 만료됐음에도 불구하고 여권 발급 금지 조치를 계속했다는 것을 이번에 진화위가 확인했다. 향후 이 사건관련하려 윤석열 정부에서 어떠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나?

"공소시효 관계없이 여권발급 금지와 내가 김대중 대통령 배려로 귀국할 수 있었던(2000.5.19) 후에도 지명수배가 지속됐다(2003.1.8. 해제)는 것은 나는 지명수배 중인데도 서울 도시를 활보하고 다녔다는 것이어서 무슨 코미디를 보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윤석열 정부에 대해 바라는 바는 전혀 없다. 재작년 KBS뉴스에서 진화위 권고가 진행되지 않고 있음을 고발하는 뉴스에서 나도 인터뷰를 했는데, 같은 인터뷰를 한 이상민 행안부 장관은 처리하겠다는 거짓말만 되풀이 하고 있었다. 처리하겠다고 해놓고 벌써 2년이 지났다. 또한 현정부에서 임명한 진화위 위원장 김광동의 행태를 보니 윤석열 정권 하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가 없다. 과거청산을 위해서도 윤석열 정부는 하루 빨리 물러나야 한다."
 
최근 김병진 부부
 최근 김병진 부부
ⓒ 김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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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진 선생은
1955 재일3세로 일본 고베시에서 출생
1970 오사카부립 기타노고등학교 입학
1973 간세이학원재학 문학부 입학
1980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편입학
1983 동 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입학(국어학전공)
1983.7.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연행되다
1984.1. 보안사 대공처 수사과 특채(6급 군무원)되어 강제근무
1986.2 동 퇴직 바로 일본으로 피신
1987 보안사 고발한 수기로 아사히신문 아사히 저널 우수작 수상 책
<보안사>를 일본과 한국에서 발간
1985 일본 센보쿠생협(현 에스콥생협)에서 아내와 더불어 한글강좌 강사
2000.5. 여권발급금지가 해제되어 귀국 2012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 상' 수상

보안사 - 어느 조작 간첩의 보안사 근무기

김병진 (지은이), 이매진(2013)


태그:#김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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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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