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이가 없는 작곡가가 몇 있다. 클래식을 넘어 음악의 부모에까지 비견되곤 하는 바흐와 헨델,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는 모차르트, 그만큼이나 유명한 베토벤 같은 이들이다. 클래식 음악만 놓고 보면 그 탄생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방에 불과한 한국이지만, 전 국민이 적어도 이름쯤은 알고 있는 작곡가가 또 한 명 있다. 러시아 제국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러시아 음악가로 꼽히는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가 바로 그다.
 
동화를 바탕으로 차이콥스키가 직접 작곡한 발레곡 '호두까기의 인형'은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발레곡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남았다. 어찌나 유명한지 러시아와의 냉전 동안에도 미국의 내로라하는 발레단들이 이를 대표곡으로 써왔을 정도다. 미국 뿐 아니라 한국과 세계 여러 나라 발레단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중심으로 한 소위 대목에 이 작품을 올린다. 자연히 발레단 수입 상당부분을 호두까기의 인형이 차지할 밖에 없는 일이다.
 
그만큼 유명한 차이콥스키지만 그의 삶은 유명세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차이콥스키의 사생활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았다는 것, 그리하여 모국인 러시아가 그를 널리 알리려 들지 않았다는 것, 차이콥스키는 물론 그 주변인들까지도 작품 이외의 면모가 조명 받는 걸 피하려 들었다는 것, 그 모두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테다. 그리고 그 중심엔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이 자리한다. 동성애자 혐오의 시대, 동성애자로 살아야 했던 천재음악가의 삶은 그 시작부터 비극으로 점철될 밖에 없는 것이었다.
 
차이콥스키의 아내 포스터

▲ 차이콥스키의 아내 포스터 ⓒ (주)엣나인필름

 
혐오의 시대가 만든 부부의 비극
 
혐오의 시대는 또 다른 비극들을 낳기 마련이다. 차이콥스키의 아내, 세상에 얼마 알려지지 않은 그의 짧은 결혼생활이 낳은 비극도 그중 하나다. 차이콥스키는 37살이던 1877년 안토니나 밀류코바와 결혼식을 올린다. 요즘에야 37살에도 결혼을 하지 않은 이가 많지만 당시로선 주변에 30대의 미혼남을 찾아보기 어렵던 때가 아닌가. 심지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던 유명 작곡가가 갑자기 결혼을 하니 세상이 떠들썩했던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오래 가지 못한다. 채 석 달도 되지 않는 짧은 결혼생활 뒤 차이콥스키가 도망쳐버리며 결혼은 파탄으로 접어든다. 어쩌면 자연스런 결과인 그들의 갈라섬은 그러나 법적으론 바로 이뤄지지 못했다. 당시 러시아의 법체계가 종교의 보호를 받는 결혼계약의 해제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고 아내가 이혼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이콥스키는 마침내 이혼을 포기했고 법적으로 아내에게 매달 상당한 금액을 건네는 것으로 그 결혼의 파탄을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2019년 작 <레토>로 세계 영화계에 제 존재를 알린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프랑스 제작사와 손잡고 만든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짧았던 차이콥스키의 결혼생활과 그 아내가 겪어야 했던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그렸다.
 
차이콥스키의 아내 스틸컷

▲ 차이콥스키의 아내 스틸컷 ⓒ (주)엣나인필름

 
남편의 장례식에 초청받지 못한 아내
 
영화는 장례식으로부터 시작한다. 다름아닌 차이콥스키(오딘 런드 바이런 분)의 장례식이다. 그의 아내라고 말하는 안토니니 밀류코바(일리오나 미하일로바 분)가 그의 장례식을 찾으려는데 어딘지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그는 남편의 장례식을 주관하는 유족이 아닐뿐더러 그 장례식에 초청받지도 못한 것이다. 그는 장례식에 모여든 인파를 헤치고 제가 미망인임을 알리며 겨우 차이콥스키가 누운 방 앞에 선다.
 
그로부터 관객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과 마주한다. 갑자기 시체가 벌떡 일어서는 것이다. 죽은 차이콥스키가 일어나 방 안을 돌아다니며 그녀에 대한 저주를 퍼붓는다. 너는 나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네가 사랑한 것은 결혼이었다고 말이다. 죽은 이가 일어나 제 아내에게 비난을 퍼붓는 광경, 이 믿지 못할 장면으로부터 <차이콥스키의 아내>가 시작한다.
 
다음은 그들의 만남이다. 파티 자리에서 젊고 예쁜 처녀 안토니니가 차이콥스키에게 첫 눈에 반한다. 괴팍하지만 자유분방하고 무엇보다 음악에 특출난 차이콥스키는 한 눈에 보기에도 비범한 인물이다. 제게 딱히 관심을 보이지 않는 그에게 안토니니는 남몰래 연정을 품지만 남녀가 유별한 150년 전 러시아에서 그에게 마음을 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차이콥스키의 아내 스틸컷

▲ 차이콥스키의 아내 스틸컷 ⓒ (주)엣나인필름

 
누가 그랬던가, 짝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그리하여 안토니니가 선택한 건 음악원 등록이다. 차이콥스키가 운영하는 음악원을 오가며 그와 인연이 트이기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차이콥스키는 제게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안토니니의 짝사랑만 깊어간다. 마침내 그녀가 꺼낸 승부수는 당대 절실한 연인이 죄다 보고 베낀다는 최신 연애편지 교본이다. 그녀의 절절한 편지에 화답한 것일까. 차이콥스키와 안토니니가 함께 하는 자리가 어렵게 만들어진다.
 
영화는 처음부터 어딘지 이상하던 차이콥스키와 안토니니의 관계가 마침내 문제를 드러내는 모습을, 결혼이 파탄에 이르는 과정을, 그로부터 안토니니의 삶 전체가 망가져가는 과정을 극적으로 그려낸다. 너무 극적이어서 어딘지 문학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안토니니는 모든 관계가 파탄에 이른 뒤에도 제가 차이콥스키의 아내라며 그에 대한 열망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 그녀를 피해 도망까지 다니며 신경증적인 증세까지 보이는 차이콥스키, 그러나 그는 끝내 그녀와 이혼하지 못한 채 법적 관계를 이어가게 된다.
 
안토니니는 차이콥스키를 사랑한다. 저 자신보다도 그를 위하는 마음이 절로 느껴질 정도. 그 사랑이 너무 커서 사랑이 이뤄지지 않자 그녀는 스스로 저를 망쳐가기에 이른다. 그 사랑이 깊은 만큼 안토니니의 절망도 크다. 제가 아직도 차이콥스키의 아내라고 주장하지만 그게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오로지 안토니니만 알 뿐이다.
 
세간에 알려진 차이콥스키와 안토니니의 관계는 그 설이 제법 여럿이다. 남녀, 또 부부의 관계를 바깥의 누가 알 수가 있을까. 동성애자란 사실 때문에 후원이 중단되고 마침내 목숨까지 잃고 말았다는 설이 있는 차이콥스키였기에 그 사생활은 더욱 꽁꽁 감춰져 있는 것이다.
 
차이콥스키의 아내 스틸컷

▲ 차이콥스키의 아내 스틸컷 ⓒ (주)엣나인필름

 
스토커적 집착인가, 비련의 여인인가
 
그러나 영화는 차이콥스키가 죽기까지 법적으로나마 그의 아내 자리를 유지했던 안토니니의 편에서 그 삶을 진득하게 돌아본다. 차이콥스키가 차린 음악원 제자이자 그보다 9살이 어렸던 여자가 그를 사랑했으나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을 얻지 못했던 이야기를 진지하게 그려내는 것이다.

호사가들은 차이콥스키가 결혼해주지 않으면 죽겠다는 안토니니의 구애에 시달리다 결혼을 허락했다고 주장하지만, 결혼을 한 것도 도망친 것도 끝내 이혼을 포기한 것도 모두 차이콥스키의 선택인 것이다. 책임지지 못할 관계를 시작하고 도망친 사내에게 실패의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그를 사랑한 안토니니의 책임인 것일까.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이 영화에서 의도한 것이 안토니니의 오명을 벗겨주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그저 차이콥스키에게 집착하고 그를 옭아매고 돈을 뜯어냈던 여자였던 것일까. 그를 사랑하고 배신당한 불쌍한 여자였던 것일까. 무엇도 확실히 알 수 없는 가운데 감독은 당대 사회에서 여성이 처했던 열악한 지위를 부각하는 것으로, 안토니니의 비극을 더 참담하게 그려낸다.
 
여자가 남자의 여권 아래 귀속되던 시대, 신부가 결혼을 위해 상당한 지참금까지 챙겨가는 것이 당연하던 남성우월적 풍토,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여자 음악가에겐 성공을 할 길이 보이지 않던 상황, 선거권마저 주어지지 않는 부당함 속에서 안토니니는 제 사랑을 쟁취하려 온 힘을 다한다. 반면 차이콥스키는 친구와 가족들 뒤에 숨어 끝내 그녀를 상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혼하겠다 싸우지도 않고 말이다.
 
<레토>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등 근 몇 년 간 개봉한 러시아 영화는 그간 만나보지 못한 뜨거움을 저들이 지니고 있음을 전 세계에 알렸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는 이 같은 흐름의 최전선에 있다 해도 좋을 인물, <차이콥스키의 아내>에도 그만의 비범함을 찐득하게 녹여냈다. 세상에 이와 같은 영화는 그리 많지 않음이 분명하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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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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