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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항쟁의 중심지였던 옛 전남도청과 5·18민주광장. 전일빌딩245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5·18항쟁의 중심지였던 옛 전남도청과 5·18민주광장. 전일빌딩245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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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광주 금남로에서 맨주먹의 시민을 향해 계엄군이 총을 난사했다. 우리 군대가, 우리 국민에게 총을 쏜 것이다. 수많은 시민이 죽고 다쳤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고, 거리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광주시민이 무장에 나섰던 이유다. 시민들은 나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시민군이 결성됐다. 시민군과 계엄군의 공방이 시가전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5시 30분경,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을 몰아냈다. 시민의 힘으로 계엄군을 물리친 것이다.

계엄군의 만행과 광주의 참상은 전라남도 곳곳으로 전해졌다. 광주의 참상을 전해 들은 지역에선 계엄군의 만행과 신군부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일부 지역주민은 광주로 달려갔다. 
 
광주를 찾은 한 가족이 민주광장 시계탑 앞에서 1980년 5월 그날을 회상하고 있다. 시계탑에선 5시 18분,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나오고 있다.
 광주를 찾은 한 가족이 민주광장 시계탑 앞에서 1980년 5월 그날을 회상하고 있다. 시계탑에선 5시 18분,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나오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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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참상은 옆동네인 전라남도 무안에도 바로 전달됐다. 계엄군의 집단 발포 이후, 광주를 빠져나온 차량시위대가 무안읍에 도착하면서다. 시위대는 나주와 함평을 거쳐 무안으로 왔다.

차량시위대는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있다'며 군민 궐기를 호소했다. 계엄군에 구타당하고, 광주를 겨우 빠져나온 지역주민의 증언도 잇따랐다. 군민들이 동요했다. 광주에 살고 있는 자녀와 친인척이 걱정됐다.

광주의 참상을 들은 군민들이 버스터미널 앞으로 모여들었다. 40∼50대 중장년은 물론 고등학생도 많았다. 금세 500여 명이 터미널 광장을 가득 메웠다. 계엄군의 만행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읍내 전역으로 퍼졌다. 
 
무안버스터미널 앞에 세워진 5·18사적지 표지석. 무안버스터미널은 80년 당시 서남권 항쟁의 거점이 됐다.
 무안버스터미널 앞에 세워진 5·18사적지 표지석. 무안버스터미널은 80년 당시 서남권 항쟁의 거점이 됐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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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고속 버스를 타고 무안읍내에 들어온 시위대 가운데 일부는 목포로 향했다. 일부는 망운면과 운남면을 거쳐 해제면으로 갔다. 해제지서(파출소)의 무기고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해제지서를 지키는 경찰은 없었다. 시위대는 수월하게 총기를 손에 넣었다. 하지만 총기의 노리쇠가 이미 제거된 상태였다.

5월 22일, 읍내에 머물던 시위대는 무안지서(파출소) 무기고를 찾아갔다. 무안지서는 지금의 무안군청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서를 지키는 경찰이 아무도 없었다.

"학생으로 보이는 시민군이 먼저, 무기고 열쇠에 총을 쐈어요. 실패했습니다. 그 옆에 있던 시민군이 쏜 총에, 열쇠가 박살 났어요. 무기고에는 칼빈소총과 많은 실탄이 있었죠. 시위대가 소총과 실탄을 차에 싣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가 막아섰죠."

당시 현장에 있던 무안군민 김학주씨 말이다. 김씨는 당시 29살, 무안박병원의 응급차 운전원이었다. 그는 날마다 응급차를 몰고 전남대병원을 오가다시피 했다. 광주의 참상을 직·간접으로 많이 보고 들었다.

김씨는 "우리를 지켜 줄 총과 실탄은 우리지역에 있어야 한다, 자칫 오발사고라도 나면 군민의 안전이 보장되지 못한다"면서 무기 반출을 막았다. 시민군이 들고 있던 무기를 내려놓았다. 김씨는 다른 주민과 함께 무기를 망운지서 인근에 숨겨뒀다가, 나중에 반납했단다. 총기로 인한 안전사고를 미리 막을 수 있었다.
  
80년 5월 차량시위대를 묘사한 청동 부조물. 무안버스터미널에 설치된 5·18사적지 표지석에 새겨져 있다.
 80년 5월 차량시위대를 묘사한 청동 부조물. 무안버스터미널에 설치된 5·18사적지 표지석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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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는 버스터미널에 모여 광주 진입을 모색했다. 하지만 계엄군이 광주 외곽을 통제해 들어갈 수 없다는 소식만 들려왔다. 나주를 통한 진입은 산포와 남평에서 막히고, 영광을 통한 진입도 송정리에서 막힌다는 얘기였다.

시위대는 23일까지 무안읍내 유선여관, 무등여인숙 등에서 묵으며 광주 진입 기회를 계속 엿봤다. 군민들은 시위대를 격려하며 응원했다.

읍내 식당에선 주먹밥과 김밥을 만들어 시위대에 나눠줬다. 음료, 과자 등 먹을거리도 건넸다. 주먹밥을 만드는 일에는 시장상인과 함께 성남리 후청동 주민들이 앞장섰다. 군민의 격려를 받은 시위대는 다시 한번 죽음을 무릅쓴 항전 의지를 다졌다.
  
무안읍은 80년 5월 시위대가 정보를 주고받으며 서로 격려하는 장소였다. 무안군청 앞에 5·18사적지를 알리는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
 무안읍은 80년 5월 시위대가 정보를 주고받으며 서로 격려하는 장소였다. 무안군청 앞에 5·18사적지를 알리는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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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렇지만, 무안은 광주와 목포를 이어주는 길목이었다. 80년 당시엔 무안을 거치지 않으면 광주도, 목포도 오갈 수 없었다. 신안과 함평, 영광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무안읍은 시위대가 정보를 주고받는 장소였다. 목포와 함평, 영광의 시위대도 무안읍내에 와서 갖가지 정보를 얻어갔다. 무안은 자연스럽게 서남권 항쟁의 거점이 됐다. 무안버스터미널이 5·18사적지로 지정된 이유다.

5·18기념 표지석은 무안군청, 청계면사무소, 지산 군부대, 망운면사무소 앞에도 세워져 있다. 당시 광주와 목포를 오가는 길목인 청계면에선 광주의 참상을 전해들은 주민들이 계엄군의 만행을 규탄하고, 시위대를 격려했다. 망운면과 해제면에서도 주민들이 시위대에 먹을거리를 제공하며 응원했다.

광주-목포간 도로의 지산 군부대 앞은 무안과 목포를 오가는 차량 시위대의 통로였다. 계엄군은 시위대의 이동을 막기 위해 저지선을 설치했다. 저지선은 부대 앞과 지산마을에 2중으로 설치됐다. 무안지역 경찰서와 지서의 무기도 부대 안으로 옮겨졌다. 총기가 시위대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목포로 오갈 수 없게 된 시위대는 무안읍과 읍면을 오가며 차량 시위를 벌였다. 21일 저녁, 부대 앞에서 군인들이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시위대가 탄 버스 2대가 공격을 받았다. 부상자가 발생했다.

23일엔 목포의 시위대 100여 명이 군부대에 찾아와 총기를 반납했다. 시위대는 3대의 차량에 나눠 타고 군부대 앞까지 왔다. 총기 반납은 당시 목포시장이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안 지산군부대 앞 풍경. 80년 당시 이곳은 무안과 목포를 오가는 차량 시위대의 통로였다.
 무안 지산군부대 앞 풍경. 80년 당시 이곳은 무안과 목포를 오가는 차량 시위대의 통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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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518전남사적지, #무안버스터미널, #무안군청, #518민주화운동, #집단발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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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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