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송골에 세워진 최시형 추모비
ⓒ 이기원
"최보따리가 누구야?"

무심코 지나치다 길옆에 세워진 추모비 비문을 보면 아마도 이런 생각이 들 겁니다. 최씨 성을 가진 사람 중에서 보따리 들고 돌아다니며 공덕을 쌓은 이가 누구일까요? '아, 그 사람!' 하고 떠오르는 사람 있나요?

정답은 '해월 최시형'입니다. 동학 2대 교주로 37년을 보따리 하나만 짊어지고 돌아다녔다고 해서 '최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최시형이 동학에 입문한지 3년 만에 스승인 최제우가 혹세무민의 죄목을 뒤집어쓰고 체포되어 처형됩니다. 그 뒤로 37년간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동학의 교세를 넓혔던 분이지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내걸었던 동학이 양반 중심의 신분질서를 위협한다고 생각했던 조선 왕조는 동학을 철저하게 탄압합니다. 그런 속에서 37년 동안 동학의 교주가 되어 살아온 최시형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혹세무민의 죄목이 최시형이라고 해서 피해갈 리 없었습니다. 끊임없이 체포의 위험이 따라다녔습니다. 특히 교조신원운동과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면서 위험이 더욱 커졌습니다.

그 험한 세월을 보따리 하나 들고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동학의 가르침을 전했다고 합니다. 때로는 교도의 집에서 머물기도 하고 때로는 산 속의 화전민의 집에 머물기도 하면서 사람이 하늘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보려 노력했다고 합니다. 하룻밤 신세를 지더라도 마당도 쓸고 새끼도 꼬아주면서 애환을 함께 나누었다고 합니다.

체포되면 죽음을 피할 길이 없는 막다른 상황 속에서도 가난하고 힘겨운 이들의 벗이 되어 생활했던 최시형의 삶의 흔적은 강원도에서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1871년 영해 교조신원운동이 진압된 뒤 강원도 영월에서 은거하면서 동학을 전파하고 교세를 확장했습니다. 그 결과 영월, 평창, 정선, 원주, 횡성, 홍천, 인제 등지에 동학이 전파되었고, 인제에서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간행되었습니다.

1893년 보은집회에 강원도의 동학교도 200여명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는 1871년 이후 강원도에서 동학을 전파시킨 최시형의 노력의 결과로 여겨집니다. 보은집회 이후 강원도에서도 대규모 동학농민전쟁이 전개되었습니다.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에서 800여 명의 농민군이 처절한 전투 끝에 무너지고 평창군 봉평면 무이리에서 1만여 명의 농민군이 최후의 격전을 벌인 뒤 해산되고 강원도의 동학농민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체포된 이들은 처형되고 체포되지 않은 이들은 자신의 행적을 숨긴 채 잠적했습니다. 후일 이들 중의 일부는 의병이 되어 다시 구국 항전을 벌이게 됩니다.

동학농민전쟁이 좌절된 뒤 최시형의 힘겨운 도피 생활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강원도와 경기도를 오가며 4년 정도 도피생활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체포된 곳이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송골이란 마을입니다. 1898년 4월 5일의 일입니다.

▲ 최시형 피체지에 세워진 비석
ⓒ 이기원
추모비를 지나 마을로 한참을 들어가면 최시형이 체포된 곳을 알리는 비석이 서 있습니다. 동학 교주 최제우가 도를 얻었다는 '득도 기념일'이 최시형이 체포된 날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체포될 것을 미리 알았는지 득도 기념일이라도 일체 모이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고 혼자 이곳에 머무르다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서울로 압송된 최시형도 처형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늘처럼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보따리 하나를 들고 가난하고 힘겨운 이들의 벗이 되어 살아왔던 삶은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후일 해월의 거룩한 삶을 기리기 위해 원주고미술동우회에서 추모비를 세웠습니다. 추모비에는 해월 최시형의 삶을 간명하게 새겨 놓았습니다.

'모든 이웃의 벗, 최보따리 선생님을 기리며'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