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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유학생으로, 전체 이름은 '하이터바 메르흐니사 이크마토브나'이다. 한국에 유학 온 지 4년이 흘러 그동안 한국어 실력은 크게 늘었다. 한국어능력시험(TOPIK)에서 최상 등급인 6급을 받았고 사법통역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곧 대학원 졸업도 앞두고 있다. 하지만 내가 한국어와 인연을 맺은 것은 이보다 훨씬, 훨씬 오래전의 일이다. 

한국어와의 인연을 말하기 전에 나의 조국 우즈베키스탄의 현대사를 잠시 짚어볼까 한다. 과거 실크로드의 중앙에 위치한 우즈베크는 찬란한 역사와 문명을 가졌지만 이 때문에 이민족의 침략을 많이 받았다. 19세기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924년 소련에 병합됐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소련을 도와 독일과도 싸웠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우즈베크는 독립을 맞았다. 우즈베크가 소련 연방에 있을 때 엄마는 학교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교사였다. 당시 우즈베크는 러시아어가 공용어였고 우즈베크어 표기도 러시아 문자인 키릴을 사용했기 때문에 러시아어 교사의 위상은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독립 이후 상황이 돌변했다. 정부 문서는 우즈베크어로만 사용하고 문자도 키릴에서 지금의 로마자로 바뀌었다. 더 이상 러시아어의 사용이 필요 없어지면서 러시아어 교사였던 엄마는 실업자가 되었다.

한국 일하러 간 엄마... 전화기 너머 단어들 받아적으며 한국어를 공부했다
 
우즈베크 가족의 생계를 위해 경기도 버섯공장에서 4년간 일한 필자의 어머니. 국제전화로 통화하면서 한국어를 처음 알게 됐다.
▲ 한국에 일하러 간 필자의 모친 우즈베크 가족의 생계를 위해 경기도 버섯공장에서 4년간 일한 필자의 어머니. 국제전화로 통화하면서 한국어를 처음 알게 됐다.
ⓒ 하이터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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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경제를 책임졌던 엄마의 실직이 길어지면서 집안 형편은 급격히 나빠졌다. 때 마침 우즈베크가 한국과 수교를 맺고 한국으로 일하러 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엄마는 우리 세 남매를 친척집에 맡기고 한국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나야 했다. 당시 엄마의 손길이 가장 필요했던 초등학교 1학년이던 동생 샤히가 엄마의 부재를 가장 힘들어했다. 

엄마는 경기도 안성의 어느 버섯공장에 취직해 그곳에서 4년간 일했다. 한국에서 번 돈은 모두 우즈베크에 송금하느라 4년간 우즈베크를 온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안성시를 벗어나 본 적도 없다. 

안성시는 서울과 직선거리로 50km 밖에 되지 않는데 "서울 구경을 한 번도 못해 봤다"는 엄마의 말에 가슴이 아팠다. 당시 한국 공장에서 얻은 병으로 엄마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마른기침을 달고 사신다. 공장에서 엄마는 유일한 외국인 근로자였는데, 다행히 사장님과 직원들이 따뜻하게 대해줘 그 고마움을 지금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계신다. 

엄마가 한국에 있는 동안 우즈베크에도 한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가 TV에 방영됐고,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한국에 대한 호기심으로 발전했다. 엄마와 국제전화로 통화하면서 나는 한국어에 대해 물었다. 수화기 너머로 엄마는 한국 단어를 알려줬고, 나는 공책에 그 말을 받아 적으며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희생으로 나와 동생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얼마전 겨울방학을 맞아 고향 부하라로 돌아가 엄마와 함께 유적지에서 기념촬영.실크로드의 중심지인 부하라에는 실크로드 때 형성된 시장이 지금도 장사를 하고 있다.
▲ 고향 부하라의 유적지에서 엄마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 얼마전 겨울방학을 맞아 고향 부하라로 돌아가 엄마와 함께 유적지에서 기념촬영.실크로드의 중심지인 부하라에는 실크로드 때 형성된 시장이 지금도 장사를 하고 있다.
ⓒ 하이터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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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한국어보다 영어를 전공하는 게 좋다"는 담임 선생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나는 고향 부하라를 떠나 우즈베크의 수도인 타슈켄트에 있는 대학의 한국어과에 입학했다. 우즈베크 수도 타슈켄트는 당시만 해도 고향 부하라에서 기차로 6시간이 넘는 거리에 있었다. 

부푼 기대를 안고 학교에 갔는데, 개강 첫날부터 예상치 못한 시련이 찾아왔다. 정원 25명 중 22명이 고려인 학생이었고 '정통 우즈베크인'은 나를 포함해 3명에 불과했다. 여기에 교수진들 대부분도 고려인 출신이었다. 그런데 우즈베크 내 고려인들은 과거 소련에서 강제이주를 통해 우즈베크에 정착했기 때문에, 러시아어는 할 줄 알아도 우즈베크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사실상 낙제생이 된 나... 그때 한국인 교수가 나타났다

이 때문에 우즈베크 언어를 모르는 교수들은 러시아말로 한국어를 가르쳤고, 과제도 러시아어로 요구했는데, 문제는 소련 연방에서 독립한 이후 성장한 나 같은 젊은 우즈베크 사람들은 러시아말을 할 줄 모른다는 점이었다. 한국어를 배우려면 러시아어를 먼저 배워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빠져버렸고 결국 나를 포함한 3명의 학생들은 사실상 낙제생이 되고 말았다. 

입학 첫날, 대학 정문 앞 버스 정류장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그렇게 학업을 포기해야 할 처지에 놓인 나에게 어느 날 운명의 여신이 손을 내밀었다.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를 통해 해외봉사 일환으로 '한국인' 채승희 교수님이 학과에 부임해 온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교수님은 우리에게 러시아어를 요구하지 않았고 그 덕에 나의 한국어 실력은 크게 향상됐다. 방학 때는 교수님을 부하라의 집으로 초대해 우리 가족과 함께 지내는 등 지금까지 사제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졸업식이 있던 날, 버스정류장에서 역경을 이겨낸 나 자신이 대견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집안 형편 때문에 '국가장학금'으로 대학을 다녔는데, 국가장학금은 졸업 후에 정부가 정한 곳에서 '3년간 의무 복무'를 채워야 했다. 그래서 나는 고향 부하라의 어느 여자 중학교의 한국어 선생님으로 부임하게 됐다. 한국어를 전공한 교사는 내가 유일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나를 매우 신기해했다. 

나는 책과 TV에서 본 한국의 전통과 문화를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수업시간에 '김밥 만들기' '부채 춤추기' 같은 한국문화 체험행사를 많이 가졌다. 정작 나 역시 한국에는 가본 적도 없었는데도 말이다.
  
고향 부하라의 중학교에서 교사로 부임한 필자가 학생들과 찍은 기념사진. 아이들에게 한국을 알리기 위해 수업 외에도 다양한 체험행사를 가졌다
▲ 우즈베크 여중학교에서 한국어 교사로 보낸 시절 고향 부하라의 중학교에서 교사로 부임한 필자가 학생들과 찍은 기념사진. 아이들에게 한국을 알리기 위해 수업 외에도 다양한 체험행사를 가졌다
ⓒ 하이터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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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달리 우즈베크에서 교사의 처우는 그다지 좋지는 않다. 더욱이 3년의 의무복무는 족쇄 아닌 족쇄였다. 특히 방학이 되면 학생들과 교사들이 목화농장에서 목화 수확에 동원되는데, 이를 '목화방학'이라고 불렀다.

소련 시절부터 유래된 이 목화방학은 유럽 국가들의 반발과 불매캠페인으로 몇 년 전에 사라졌지만, 세계 최대의 목화 생산국 우즈베크의 아픈 역사이다.
 
여자중학교 한국어 교사를 그만두고 고향 부하라에 진출한 현대건설에서 회계와 통역 업무를 보던 시절에 찍은 기념사진.
▲ 현대건설 근무 당시 모습 여자중학교 한국어 교사를 그만두고 고향 부하라에 진출한 현대건설에서 회계와 통역 업무를 보던 시절에 찍은 기념사진.
ⓒ 하이터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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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의무복무를 마치고 나는 학교를 사직했다. 이후 친오빠를 따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몇 년간 머물렀는데 이때 러시아어가 한국어만큼 늘었다. 이후 고향 부하라로 돌아와 우즈베크의 대규모 건설프로젝트에 참여한 한국기업 2곳에서 통역과 회계업무를 봤다. 그 뒤 친오빠의 도움을 받아 2020년 봄에 마침내 꿈에 그리던 한국 유학을 단행했고, 그렇게 지금껏 4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얼마 전부터 나는 우즈베크에 있는 사촌과 어린 조카 등 6명을 대상으로 온라인으로 한국어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엄마로부터 시작된 한국어와의 인연이 나를 통해 조카들까지 이어지고 있다. 운명이 또 나를 어느 곳에 데려다 놓을지 알 수 없어 두렵지만 동시에 묘한 설렘으로 가슴이 뛴다. 

통상 한국에 온 우즈베키스탄 유학생, 특히 비서구권 학생들은 아르바이트나 취업을 위해 한국에 왔을 거라는 편견과 선입견에 시달리고는 한다. 그런 유학생도 일부 있겠지만, 나를 포함해 다수의 비서구권 유학생들은 한국 자체가 좋아서 유학을 결심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내 이야기를 통해 한국에 온 외국 유학생들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고 이해가 깊어졌으면 좋겠다.

태그:#우즈베키스탄, #한국어, #유학, #한국, #한국어능력검정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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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유학생입니다. 우즈벡에서 한국어과를 졸업하고 현재 한국에서 석사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5년째 생활하고 있으며 앞으로 한국과 우즈벡, 두 나라의 발전과 교류를 위한 가교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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